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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May 13. 2020

때깔이 달라 때깔이

 어릴 적부터 나는 쌔카맸다. 말 그대로 검은색이었다. 그냥 까맣다기에는 뭔가 밋밋할 정도로 피부가 검었다. 시골에 살았다. 농협 마당이 놀이터였고, 뒷골목은 촌놈들의 무대였다. 그 무대를 쨍한 태양빛 아래 친구들과 누볐다. 1분도 다름없이 같이 놀았는데 피부는 나만 검었다. 친구들은 나를 깜둥이라고 불렀다.

 나의 시계는 곧고 옳아서 중2병이 정말 중학교 2학년 때 왔다. 세상의 많은 것이 이유 없이 가소롭거나 지겨웠다. 혹은 싫었다. 나의 피부도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나는 연구에 몰두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하얀 피부를 가질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꼭 야채가게에 들렀다. 일주일 용돈인 5000원으로 야채를 샀다. 하루는 감자를, 어느 날은 오이를, 어떤 날은 버섯을 달라고 했다. 칼질도 해본 적 없으면서 뭐든 얇게 썰었다. 그리곤 얼굴부터 팔, 다리까지 온몸에 얹어놓고 팩을 했다. 그걸 본 어머니가 말했다. "그거 한다고 연예인 안된다. 때깔이 달라 때깔이". 나는 속으로 외쳤다.


'연예인이 되고 싶지도, 우윳빛깔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저 먹다 남은 숭늉 색깔 정도면 된다고요. 박박 씻고도 왜 안 씻냐는 말을 듣지 않고, 흰 티를 자신 있게 입고, 휴가를 바닷가로 다녀왔냐는 말을 듣지 않는, 그런 정도의 피부를 원하는 거라고요'

 사춘기 소년은 속에 끓는 울분을 토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굳은 감자를 떼어내는 일이 얼굴에 붙은 청테이프를 떼어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느낀 후에 채소 팩을 그만두었다. 


 그러니 천문대 일은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게 완벽했다. 천문대 일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밤에 일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햇빛에 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별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피부에도 좋다니!". 원 플러스 원 행사에 당첨된 듯 천문대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행사는 끝나기 마련이고 결국은 값을 치워야 하는 순간이 온다. 대장님의 한마디가 허공에 퍼졌다. "오늘 낮에 아이들이 온다네, 태양 좀 보여줄래?".

 근엄한 왕이 '태양 앞에 서거라' 명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생각했다.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지만 결국 일이다. 신변에 문제가 된다면 모를까, 신체가 변하는 정도로는 거절하기 어렵다. 기어코 태양을 봐야 하는 순간에 놓였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그리곤 망원경을 한 대 두고 아이들과 마주 섰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35도를 넘었다. 구름도 더위에 놀라 자취를 감췄다. 이마에선 선크림과 땀이 하나 되어 흰 눈물로 흘렀다. 


"쌤! 땀이 흰색이에요!"

"썬크림을 많이 발랐더니 녹았나 봐"

"얼마나 많이 바르면 그래요?"

"쌤이 더 까매지는 게 싫어서 좀 많이 바르긴 했어"

"까매지면 안 돼요?"

"숯처럼 검어질 필요도 없잖아"

"그래도 쌤은 재밌잖아요"


 유럽 최고의 지혜로 칭송받는 대 철학자 그라시안은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본성에 더욱 신경을 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피부색에 집착하며 태양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이들은 것보다 나 그대로를 바라봐주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부끄럽다. 나는 아이들에게 태양의 표면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태양보다 밝게 나의 좁은 내면을 비추었다.

  그 이후론 태양 관측에 망설임이 없이 나간다. 아주 혁명적인 변화다. 우주에 떠있는 지구에서 선크림이나, 썬스프레이, 썬스틱, 모자 없이 태양과 대면하는 전 우주적인 일이 된 것이다. 

  나는 여전히 흰 피부가 좋다. 거뭇한 피부가 맘에 들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쉽고 모자라도 여전히 내 몸이고, 평생 인생을 동행할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 적어도 피부색이 나의 자아를 갈아먹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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