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어머니와 화해하세요, 제임스 휘슬러 <어머니의 초상>
안녕하세요! 별쌤입니다.
오늘은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을 가져왔습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어머니의 초상>입니다. 원제는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 1번입니다.
사실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엄마와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전화도 안 하고 친정에 가지도 않았어요. 엄마도 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요. 평소에도 저희 모녀는 그리 자주 전화 연락을 하고 살갑게 지내는 엄마와 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걸지 엄마는 저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어요.
처음 한 보름 동안은 그냥 제 감정에 충실하고자 했던 저를 인정하고 제 삶과 일상에 충실하게 지냈습니다. 뭔가 내려놓은 듯한 느낌에 오히려 조금 홀가분했던 것도 같습니다.
이제 칠십 대 초반인 저의 어머니는 지난 10년 간 많이 편찮으셨어요. 당뇨합병증, 수 차례 골절 수술, 최근엔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수술을 하시고 그 뒤 두 번째 고관절 수술을 하셨어요. 그동안 어머니 옆에서 간병하시느라 아버지께서 제일 많이 고생하셨고, 저희 삼 남매도 아버지를 도와 엄마를 챙겨드렸습니다.
특히, 여동생과 저는 보통은 엄마가 딸에게 해주는 것들을 반대로 엄마에게 챙겨드렸어요.
지금까지 주위 친구나 후배들이 육아며 살림에 친정엄마의 도움을 많이 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저의 처지를 한 번도 원망한 적은 없어요. 뭐라도 딸에게 하나 더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으로 제가 아버지, 엄마께 뭐라도 하나 더 해 드리며 기뻤습니다!
그런데 올해 엄마의 뇌졸중으로 인한 뇌동맥 스탠트 시술과 연이은 고관절 골절로 인한 수술로 아버지와 번갈아 가며 주말에 엄마 간병을 해 드린 뒤로 심경에 변화가 조금씩 생겼습니다.
주말에 한 시간 거리를 달려 아버지와 교대로 엄마 병실을 지켜드렸는데...
고맙다는 인정이 받고 싶었던 걸까요?
병실에서 어린아이 같이 투정 부리고 짜증을 내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평소에도 엄마는 늘 그러셨지만...
너무 아파서 그러셨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엄마가 싫어지고, 그런 엄마의 모습에 지치고 점점 체념하며 마음을 닫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늘 엄마 자신에게만 갇혀 주변을 둘러볼 줄 모르는 것 같은 엄마가 안타까우면서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퇴원하신 뒤로 엄마와의 거리 두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으로...
자주 전화하고 집에 들러 부모님을 챙기던 큰 딸이었는데 엄마 퇴원 뒤로 갑자기 연락을 뚝 끊고 지내는 딸이 궁금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할 텐데... 엄마는 먼저 전화를 하지 않으십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홀가분함에서 신경쓰임으로 마음이 변해갑니다.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이 왜 이렇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올해 저희 집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큰 딸은 대학에 입학해 서울로, 둘째는 기숙형 고교에 입학해 두 아이 모두 집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제 생활의 1순위는 가족이었습니다. 아니 딸들이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년간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며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
아이들 교육 부분에 있어서도 지방 소도시에서 큰 딸을 정시로 소위 말하는 스카이에 보내고, 둘째도 엄청난 입학 커트라인을 기록한 기숙형 고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아이들도 저도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도 보람이 있었어요. 그렇게 두 아이를 독립시키고 나니 마치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낸 기분이랄까.... 홀가분함에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집에 아이들이 없고 남편과 둘만 지내다 보니 너무 편하고 집안일도 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제 일상에서 부여잡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국이며 찌개, 전, 각종 나물 반찬에 물김치, 겉절이 등등 주변 지인들은 엄두도 안내는 음식들을 가족들을 위해 식탁에 차려 내었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집안일...
이제는 그런 일들에 대한 의욕이 차츰 사라지고 내려놓게 되었어요. 엄마에 대한 제 심경의 변화도 그러한 과정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빈 둥지 증후군과 갱년기가 같이 오고 있는 걸까요?
자꾸만 죄책감이 올라옵니다.
편찮으신 엄마한테 내가 너무 하는 건가? 나쁜 딸인가?...
엄마 집 가까이 여동생네가 살고 있으니, 그래도 마음은 조금 놓이지만 동생한테도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최근 한 2주 간은 잠을 잘 못 잤습니다. 애써 마음 저 한 구석으로 밀어 놓고 외면하고 있던 엄마가 하루 종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어제 여동생이 엄마랑 마트에 들렀다 화상전화를 걸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이제 혼자서는 마트에도 갈 수 없는 힘없고 몸도 불편한 늙고 쇠약한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엄마도 화면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먼저 인사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애써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도 저도 둘 다 그런 성격이 못됩니다.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들이지요.
어색한 잠깐의 화상통화라도 하고 나니 그동안 삶은 고구마 몇 개 먹은 것 마냥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잠도 잘 잤습니다.
다음 주말엔 오랜만에 엄마 아버지 모시고 가족끼리 밥 한 끼 먹자며 여동생네와 일정을 조율했습니다.
마음이 한 결 가볍습니다!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지요?
휘슬러도 작품 <어머니의 초상>은 1934년, 미국 정부가 어머니의 날을 기념하여 우표에 찍은 후로 미국 모성(母性)의 아이콘이 됩니다. "미국의 어머니들을 기억하고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도 붙였지요. 그렇게 휘슬러도 유명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휘슬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와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을 하는 어머니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외면했지요.
이 그림도 우연히 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던 날 사실은 다른 모델이 예정되어 있었고, 물감과 그림 그릴 준비를 마치고 모델을 기다리고 있던 휘슬러 앞에 끝내 모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휘슬러의 어머니는 자신을 그려볼 것을 권하고, 그렇게 의도치 않게 어머니를 그리게 됩니다.
또한 이 작품은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 1>이라는 원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애초에 '초상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과 형, 색 같은 순수한 조형적 요소의 조화로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작품에서 보이듯 화면 안의 모든 색과 형, 위치, 구도는 매우 균형적입니다. 휘슬러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결과이지요.
검은색과 회색이라는 색감으로 인해 그림 속 화가의 어머니의 모습은 엄숙하고 절제된 느낌을 줍니다. 꼿꼿한 그녀의 옆모습과 다문 입술, 비록 차가운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그동안 그녀가 살아온 세월의 인고와 품위가 전해집니다.
휘슬러는 그림을 통해 특정 인물이나 장소를 묘사하여 감동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음악처럼 화면 속의 구도와 색채의 변화를 통해 미적인 감상이 되도록 의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휘슬러의 의도와는 달리 이 작품이 <화가의 어머니>라는 제목이 붙여져 미국 모성의 아이콘으로 유명세를 타자 그는 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차갑고 엄격한 그의 어머니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억센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모델의 대타로 아들 작품 앞에 섰지만 서있기조차 힘들어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져야만 할 정도로 어머니는 힘없고 가엾은 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런 어머니를 외면하려 고개를 돌립니다.
끝내,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비록 화가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은 모성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혹시 지금 어떠한 이유로든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더 늦게 전에 꼭 화해하세요. 어머님이 살아 계시지 않아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신다면 돌아가신 어머니께 마음의 편지를 쓰세요. 그리고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자유로워지세요!
휘슬러는 1834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주로 유럽에서 활약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그림의 주제 묘사보다는 그림 자체의 미학을 중시하였습니다. 460여 점 이상의 에칭을 제작하였고 판화가로서도 최고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오늘 소개한 <회색과 검은색의 구성 1: 화가의 어머니>는 근대 회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