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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Nov 23. 2017

한 대를 치더라도 제대로 쳤다면...

Appetizer#107 꾼


믿을 인물은 역시나 없었고, 믿었던 재미는 의외로 미지근했다. <꾼>은 영화의 소재처럼 관객의 허를 찌르려 애쓴다. 끝나는 순간까지 관객의 뒤통수를 향해 무수히 많은 잽을 날리는데, 그 잽의 효과는 미지근하다. 잽으로는 기분만 상하게 할 뿐,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다. <꾼>은 한 방이 없던 영화다.


<꾼>은 “사기꾼을 믿지마”라는 직설적인 대사를 통해 경고를 보낸다. 동시에 관객을 현란한 사기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한 번 속았는데, 또 속으면 호구가 되는 <꾼>에서 관객은 호구가 되지 않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둬야만 한다. 이렇게 관객을 긴장하게 하고, 주인공의 게임에 동참하게 하는 것까지는 흥미롭다.


그런데 <꾼>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의심하게 하면서도, 그 의심을 풀 기회는 꼭꼭 숨겨둔다. 그러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모든 실마리를 던져준다. 끝없이 증폭된 의심은 단 하나의 순간에 수많은 플래시백으로 해소되어 버리는데, 그 양이 너무도 많기에 체할 지경이다. 아니, 영화의 안일한 맺음에 허무함을 느껴야 했다.



케이퍼 무비의 전개를 따르는 <꾼>은 사기를 성공시키기 위해 판을 짜고, 이를 실행한다. 범죄의 과정은 꽤 정교하게 묘사되고, 마지막엔 이 과정들이 결국 하나의 큰 그림이었다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꾼>의 전개가 아쉬운 건, 황지성(현빈)의 계획을 그 혼자만 알고 있다는 한계에서 온다. 관객은 황지성이 보인 몇 번의 사기극에서 잔재미를 얻을 뿐, 그가 정확히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볼 수가 없다.


이때 영화의 시점은 자연히 박희수(유지태)의 것이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박희수에게 이입하기 힘들어지는 것도 문제다. 결국, 영화의 진짜 주인공 황지성은 혼자 북치고 장구를 치지만, 정작 관객이 맞춰줄 장단이 없다. 하나의 사기에서 다음 사기로 넘어갈 때, 관객이 할 수 있는 건 합리적인 추리가 아닌, 뒤통수를 까고 맞는 걸 기다리는 것뿐다.


이렇게 미리 짜인 각본들만 이어놓다 보니, 영화 속 캐릭터들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도 없다.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그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 영화에서 인물의 내면은 들여다보려 하면, 그다음 범죄 계획이 브리핑 되고, 다음 판이 진행된다. 인물은 그저 정해진 길대로 흘러갈 뿐이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캐릭터가 도구적으로 소모된다. 영화가 준비한 반전을 통해, 이 도구적 존재들을 이해할 여지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나와 안세하는 그들의 흥미로운 연기에 비해, 캐릭터의 깊이가 너무도 얕았다.



작년에 <꾼>처럼 ‘사기’를 소재로 한 <마스터>는 돈의 액수로 충격을 줬다. (최순실 게이트보다 규모가 작았던 탓에 황당함을 주기도 했지만) 이 영화가 내세운 건 사기의 크기였다. 이제는 규모로는 재미를 주기 힘들다(혹은, 현실을 따라잡기 힘들다)고 <꾼>은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규모 대신, 혼란스러운 반전을 연타로 날리며 재미를 주려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뒤통수를 얼마나 더 많이 때리는가에만 열을 올릴 뿐, 속은 비어있었다. 빈주먹의 연타에 불과했다. 차라리 한 대를 치더라도 제대로 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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