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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Dec 03. 2017

‘IMF’를 소환한 장르적 시도

Appetizer#108 기억의 밤

'시네마피아' 양기자가 본 <기억의 밤>의 평점은?


기억은 영화의 좋은 소재다. 애틋한 첫사랑의 기억은 멜로 영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는 스릴러 등의 장르에서 자주 애용한다. 이런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는 데서 더 흥미롭다. 특정 인물의 시점으로 주관적으로 바라본 과거는 왜곡된다. 더 아름답게, 혹은 더 두렵게 기억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어떤 부분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겪지 않았던 걸 기억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을 다룬 영화는 ‘누가’, ‘무엇’을 ‘왜’ 기억하려 하는지(혹은 기억하지 않으려는지) 묻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 미셀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 그리고 원신연의 <살인자의 기억법> 등의 영화에서 기억은 영화의 메시지 그 자체였다. 노골적으로 ‘기억’을 제목에 앞세운 <기억의 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기억의 밤>은 스릴러 및 호러 장르에서 볼 수 있던 연출을 통해 관객과 두뇌 싸움을 한다. 영화 속 진석(강하늘)은 정신적 문제가 있어 약을 복용 중이다. 이는 진석의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다. 또한, 진석이 보는 것이 현실과 꿈, 그리고 환각을 오가며 관객에게 혼란을 준다. 관객은 기이한 공간(집)과 믿을 수 없는 인물들, 그리고 영화의 화자인 진석까지 의심해야 한다. 의혹은 커지고, 자연히 영화의 긴장감도 올라간다.



장항준 감독은 다양한 장르적 시도를 통해 영화를 흥미롭게 끌고 가는 데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어렵게 만든 영화의 기묘한 기운은 어느 순간, 급격히 걷혀 버린다. <기억의 밤>의 후반부는 마땅히 해소되어야 할 질문의 답이 제시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설명이 너무도 자세하다. 모든 게 설명되어 흥미도 증발한다. 자세한 해설 탓에 관객이 참여해 즐길 거리가 없다. 이 친절한 해설로 영화가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뚜렷해졌지만, 그만큼 영화의 힘이 떨어져 버렸다.


<기억의 밤>의 친절함과 비교되는 극단적인 영화로 <곡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꽤 불친절했던 <곡성>이 흥행한 데엔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한몫을 했다. <곡성>은 영화에 깔린 수많은 의문을 끝까지 물음표로 남겨둔다. 나홍진 감독은 많은 단서를 영화 곳곳에 묻어뒀지만,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어떠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덕분에 관객이 직접 영화 속의 기호들을 찾아 분석하고 해석해야 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의미를 추리하는 게임에 참여했고, 덕분에 영화는 더 신비한 힘을 얻었다.


그렇다면 장항준 감독은 왜 이토록 친절한 해설로 영화를 끝내려 했을까. 이는 <기억의 밤>이 보여준 기억의 끝에 ‘IMF’라는 국가적 사건이 있었고, 장항준 감독이 사건을 경유해서 하고 싶던 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기억의 밤>에 있는 모든 사건은 모두 IMF로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모든 불행과 절망이 시작되고, 기억을 ‘왜곡’해야 할 지경까지 간다. 그렇게 <기억의 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마주하고, 대화를 시도한다.



영화적 재미를 줄여서라도, 장항준 감독은 IMF라는 국가적 위기와 그 사건을 겪은 국민의 초상을 스크린에 소환했다. 20년 전 시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20년 전의 그 날이 텅 빈 시간으로 남아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위기를 초래한 이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었다. 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기억의 밤>은 특별한 영화로 다가올 것이다.


결국, <기억의 밤>은 진석의 이야기에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객에겐 강렬한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관객에겐 이 영화는 ‘덜 기억했어야’ 좋았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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