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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r 25. 2018

[레이디 버드] '레이디', 그리고 '버드'의 의미

Appetizer#120 레이디 버드

'시네마피아'의 양기자는 <레이디 버드>를 어떻게 봤을까요?


*****<레이디 버드>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는 글입니다. 영화를 관람하신 뒤,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최근 흥행한 <리틀 포레스트> 속의 고향은 도시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언제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늘 옛 모습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 공간. 옛 친구들이 변치 않은 모습과 우정을 간직하고 기다리고 있을 공간. 그리고 과거의 추억이 잠들어 있는 공간. <리틀 포레스트>로 힐링을 받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채, 오롯이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 공간은 이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리틀 포레스트>가 고향과의 재회를 말했다면, <레이디 버드>는 고향과의 이별을 말한다.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만,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고향과의 이별을 통해 뭔가 전하려 했다. 그리고 이런 ‘이별의 모양’이 주인공의 이름이자, 영화의 제목인 ‘레이디 버드’에 함축되어 있다. 지금부터 쓸 글은 ‘레이디 버드’, 그 이름의 의미에 관한 잡담이 될 것이다.



버드의 의미

'lady bird'의 사전적 의미는 무당벌레다. 크리스틴은 무당벌레가 되고 싶었던 걸까? 영화 속 크리스틴의 방엔 새의 몸에 크리스틴의 머리가 붙은(혹은 크리스틴의 머리에 새의 몸이 붙은)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말한 'lady bird'는 'lady‘와 'bird’의 합성어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이 두 단어를 띄어 쓴 걸 보면, 그렇게 이해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주인공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이 사는 곳, 새크라멘토가 지겹다. 그녀는 따분하고 새로움이 없는 그곳에서 무기력함을 느끼고, 희망을 찾지 못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새크라멘토는 크리스틴에겐 ‘억압’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그녀는 그 억압으로부터 저항하고 싶었고, 그 땅에서 부모가 지어 준 이름마저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이 이름에 있는 ‘버드’는 새를 뜻하고, 이 동물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늘을 난다는 것다. 크리스틴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지금 발붙이고 있는 땅, ‘새크라멘토를 떠나려 한다. <레이디 버드>에서 관객이 목격할 수 있는 건, 새크라멘토라는 억압의 땅에서 탈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녀의 거침없는 모습이다.


레이디 버드는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범죄에 가까운 걸 저지르고, 자신의 불우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거짓말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궤도를 바꾸고자 발악한다. 유쾌하면서도 발랄하고, 때로는 과감한 레이디 버드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새크라멘토라는 지역의 그릇이 그녀를 품기에 작아 보이기는 한다.



레이디의 의미

그 다음 살펴볼 건 ‘레이디’라는 명사다. ‘버드’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틴은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이름에 드러내는데, 그녀는 그냥 새가 아니라 숙녀인 새가 되고 싶어 한다. 이 ‘숙녀’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할까. 숙녀는 소녀보다 성숙한 여성을 뜻하는 말로 볼 수 있고, 레이디 버드는 이를 이성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을 설레게 하는 남자와의 사랑을 원한다. 이성과의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섹스를 갈구하는 에피소드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한다. 레이디 버드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놀라고, 서투른 행동에 웃게 되며, 그녀의 판타지가 깨지는 순간 씁쓸함이 퍼진다. 청소년기의 소녀가 성에 눈을 뜨고, 조금은 어른이 되면서, 세상의 쓴맛을 보는 이 과정은 웃프며, 비슷한 시기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지랄발광 17세>가 떠오르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런 소란스러운 과정을 통과해 크리스틴은 결국, 그녀가 바라던 ‘레이디 버드’가 된다. 이상형이었던 남자와 첫 경험을 함으로써 소녀와 작별하고(레이디가 되고),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고향의 억압에서도 벗어난다(버드가 된다). 그녀는 그렇게 바라던 뉴욕에 간다. 과거와 작별하고 마침내 ‘레이디 버드’가 된 것이다.


이 변화를 카메라는 상징적인 샷을 통해 보여줬다. 새크라멘토에서 레이디 버드가 길을 걸을 때, 카메라는 그녀를 우에서 좌로 따라가지만, 뉴욕에서는 좌에서 우로 트랙킹한다. 두 장면을 비교하면 크리스틴은 서로 반대쪽을 향해 걷는다. 두 공간의 거리, 크리스틴과 레이디 버드의 거리, 과거와 미래의 거리를 카메라는 그렇게 표현했다.



이별 후에 찾은 이름

그래서 그녀는 행복했을까. 영화는 ‘레이디 버드’라는 가명의 끝과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담으며 퇴장한다. 원하던 레이디 버드가 되었건만, 놀랍게도 그녀는 그 이름을 거부했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남자에게 그녀는 자신을 ‘크리스틴’이라 소개한다. (뉴욕에 왔더니 ‘레이디 버드’라는 가명이 촌스러워 보였던 걸까?) 그리고 그때쯤 깨닫는다. 자신을 숨 막히게 했던 새크라멘토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영화에 마지막에 와서야 그녀는 부모가 준 이름을 되찾고, ‘크리스틴’ 주변에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의 이름 찾기 여정이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 의미를 몰랐던 새크라멘토는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행복, 가족의 사랑이 넘치던 곳이었다. 그녀를 질식시킬 것만 같던 것의 정체는 가족과 친구의 풍만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서야 그걸 느꼈고, 아마 당분간은 좀 더 향수병에 시달릴 것이다.


P.S 늘 그랬듯 그녀는 잘 해낼 것이다.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영화관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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