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Oct 05. 2018

[암수살인] 모순 속에 빛나는 영화

영화 일기#064 암수살인

<암수살인>은 제목에서 풍기는 진한 잔혹함과 달리 절제된 영화다. 완료된 살인 사건의 흔적을 쫓고, 묻혀 있는 기록들을 끄집어내는 갑갑한 과정을 담은 영화로 덤덤히 진행된다. 이는 잔잔한 바다 위를 트래킹하는 오프닝부터 느낄 수 있으며, 이 장면은 물속에 잠긴 비밀(혹은 시체)을 생각나게도 한다. (이런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가 한 편 떠오르는데, 과거의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미스틱 리버>다)


장감 넘치는 스릴러, 혹은 피가 튀는 액션 장르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 장르의 관습으로 볼 때, 이 영화는 재미있다고 보기 힘들다. 대신, <암수살인>은 한 형사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집념’이라는 표현도 좋을 것이다. 이 남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실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동료에게는 독이 되는, 그리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사건에 몰두하고 있다. 오직 ‘형사’라는 사명감으로 매달리는 그는 우직함과 미련함,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 중이다.



김형민(김윤석)이 강태오(주지훈) 말만 믿고 사건의 단서를 얻으며, 추리하는 과정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과 닮은 구석이 있다. 살인마를 소재로 만는 상업적인 영화임에도 심심한 느낌을 준다는 것마 말이다. 이 두 영화에서 형사는 이미 패배를 경험했고, 범인은 이를 조롱하고 과시한다. 김형민은 강태오에게 ‘한 수 물려 달라’고 애원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서류 속에서 단서들을 찾고, 이어 맞추는 장면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두 기자가 떠오른다. 이런 명작의 주인공과 김형민이 오버랩 될 수 있는 건, <암수살인>이 스릴의 영화가 아닌 덕이다. 자극 대신, 진실을 구하는 지루하면서도 처절한 과정을 담았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진실은 단번에, 멋지게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김형민만이 강태오의 진술을 ‘확신’한다. 그러나 믿는다고 끝이나는 게 아니다. 그 이후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 역시 극적이으며, 관객은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형사의 오기를 목격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암수살인>은 답답한 과정만 계속 나열하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김형민이 말한 “믿으면서 의심하자”라는 대사엔 의지와 무기력이란 모순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은 형사의 책임감 앞에 무의미하다. “나 혼자 바보가 되면 그만”이라는 그의 대사는 이 세상이 그런 바보가 있기에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멋진 대다.



김형민을 연기한 김윤석은 처진 어깨와 지친 표정으로 주도권을 잃은 형사의 비참함을 잘 표현한다. 그는 최근 출연작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들을 연기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끌려다니는 역할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자주 보던 이전의 강렬한 캐릭터보다, 강태오에게 휘둘리는 그의 연기가 더 강렬하고 빛나는 모순을 느낄 수 있었다.


주지훈의 연기도 인상적인데, 속된 말로 ‘약을 먹은듯한 연기’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기이하고 섬뜩하다. ‘약’이라는 민감한 평이, 이제는 찬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에겐 모순이지 않을까. 온갖 모순들 속에 빛나고 있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더 많은 영화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시네마피아'와 함께 영화에 취하는 시간 '시네마 바'!


매거진의 이전글 [명당] 자신의 자리는 잘 못 본 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