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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an 02. 2019

[PMC: 더 벙커] 현란한 스타일에 취하고 남은 것

영화 일기#071 PMC: 더 벙커

<더 테러 라이브>는 계산적이었고 효율적인 영화였다. 하정우를 한 공간에 가둬두고서도 극한의 긴장감을 연출해냈다. 35억이란 비교적 적은 예산을 꽉꽉 눌러 담아 5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손익 분기점 약 200만) 엄청난 성과도 거뒀다. 이 좋은 기억을 가지고 다시 뭉친 김병우 감독과 하정우의 <PMC: 더 벙커>(이하 <더 벙커>)도 한정된 공간을 다채롭게 활용한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다.


<더 벙커>는 지하 벙커라는 밀폐된 공간을 다양하게 펼쳐서 보인다. 전작이 스튜디오 안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니, 사이즈는 몇 배로 커진 셈이다. 그러나 하정우는 여전히 모니터를 통해 상황을 보고, 이에 맞게 대응하고 지시를 내린다. 이쯤 되면, 김병우 감독은 모니터를 응시하는 인간과 현실을 중계하는 카메라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혹은, 하정우를 가두고, 그 반응을 보는 걸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좁은 공간 속에 긴장감을 만들기 위해 카메라는 더 많이 움직인다. 핸드헬드의 떨림으로 시시각각 조여 오는 공포를 시각화했다. 그리고 굉장히 공들였다고 자랑하는 음악으로 긴장감을 청각화했다. 이 두 가지 시청각적 효과가 뭉쳐 <더 벙커>는 스릴러의 리듬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좋은 것도 과하면 별로라 했던가. 이런 형식과 효과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때로 너무 과해 어지러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카메라 홀로 심각한 분위기를 잡아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는 배우의 연기와 영화 속 분위기로 몰입하는 걸 방해한다. 눈이 카메라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다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한 꼴이다. 이야기와 감정선만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데 자신이 없었던 걸까. 영화의 외적 스타일이 속의 이야기를 묻어버렸다.



<더 벙커>의 이야기 측면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남과 북을 풀어낸 방식이다. <PMC: 더 벙커>의 주인공은 남과 북을 대변하는 인물이지만, 이념 문제로 대립하지는 않는 편이다. 남북을 소재로 한 영화 중 이처럼 이념 문제에 무관심한 영화는 드물다. 대립을 보이는 대신 <더 벙커>는 두 나라의 유사한 입장을 말한다. 영화 속 남과 북은 강대국의 정세에 휘둘리는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대립이 있을 자리엔 ‘동료를 위해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가’란 딜레마의 문제가 남는다.


<더 벙커>는 화려한 형식으로 관객의 눈을 홀리는 한편, 두 남자가 마음을 열어가며 ‘동료’가 되는 과정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 했다. 그렇게 한 민족 두 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고자 했지만, 닿지 못하고 끝난다. 영화의 진심은 여전히 지하 속 벙커에 묻힌 채,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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