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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31. 2016

탐미주의, 탐미 '주의'

Movie Appetizer#05 아가씨

탐미주의자의 도화지

세 가지 시점 –차이와 반복

그의 친절 - 아름답거나, 지루하거나


일제 강점기, 혼란스러운 시대에 백작(하정우)은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가 상속받을 재산을 원했다. 그는 숙희(김태리)를 히데코의 하녀로 추천한다. 숙희를 이용해 아가씨의 마음을 얻겠다는 계획. 히데코는 매일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외로운 여인이다. 저택 밖의 세상을 모르고 자라 순진하고, 고독한 히데코. 숙희는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그리고 백작은 아가씨의 재산을 모두 차지할 수 있을까.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기이한 저택에서, 순진한 아가씨의 마음을 얻기 위한 두 사람의 유혹이 시작된다.



탐미주의자의 도화지

칸에서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아가씨>의 작업으로 벌컨상(뛰어난 영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을 수상했다. <아가씨>의 영상미는 칸의 인정이라는 인장을 새겼고, 이제 관객은 그 영상에 빠져들 일만 남았다. 박찬욱 감독은 (늘 그랬지만) 이번 영화에서 프레임 안에 놓일 피사체, 공간 등 미장센의 구축에 공을 들였다. 매력적인 공간 속, 아름다운 인물 곁을 카메라와 누비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흥미로웠다.


한국, 일본, 그리고 유럽(영국)의 양식이 혼합된 저택은 각 문화의 아름다움이 섞여 귀족다운 분위기를 양껏 뿜어낸다. 이 공간은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었던, 혼란스러운 시대의 반영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려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해주는 탐욕적인 공간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인물이 어떤 공간 속에 있는지’, ‘그 공간은 관객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지.’ 등을 생각하며 관람하는 것도 <아가씨>의 즐길 거리가 될 수 있겠다.



세 가지 시선

<아가씨>는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는 이야기의 시점이 다르다. 하나의 시·공간을 다른 시점으로 풀어낸 1장과 2장,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3장으로 구성된다. 서로 다른 시점으로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이러한 구성의 재미는, 각 장이 보여주는 차이와 변주 있다. 반복 속에 비밀이 있고, 발견이 있으며 이야기는 더 풍부해진다. 박찬욱 감독은 세라 워터스의 원작 『핑거 스미스』에서도 이 시점의 차이가 흥미로웠다고 밝혔다.


원작만큼 이 시선의 변주가 잘 표현되었을까. 관객은 두 가지 시점을 모두 보고, 퍼즐 조각들을 맞춘다. 그런 뒤에야 감독이 그린 거대한 그림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퍼즐을 얼마나 즐길 수 있느냐가 이 영화의 ‘대중성’을 판단하는 지표가 될 것만 같다. 이미 나홍진 감독이 구현한 <곡성>의 수수께끼에 관객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영화를 입체적으로 보는 즐거움이 정점에 이른 시기,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로 영화의 미학을 추구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된다.



친절해서 대중적이거나, 지루하거나

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면, <아가씨>는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 전작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듯하다. 미리 영화를 본 뒤에 작성된 기사들에서 그런 뉘앙스를 읽을 수 있다. 무엇이 상업적인가에 대한 고민 중, 이번 영화가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가장 다른 점이 어디인가를 살펴봤다. <아가씨>는 그의 전작과 비교해 친절함이 돋보인다.


그런데 역으로 이 친절함이 서사의 매력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이 영화가 시도한 '반복'이라는 전개 방법이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반복된 서사가 인물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법엔 독이 될 수도 있다. 반복과 시선의 분산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이는 인물을 향한 이입을 차단하는 벽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가씨>는 두 가지 시점이 있지만, 그 두 시점이 완성하는 이야기‘들’은 변주, 퍼즐, 수수께끼와는 다르다. 비교 항이 필요할 것 같다. 하나의 사건과 두 가지 시점. 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구조이다. 홍상수 감독은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두 가지 개별적 서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 간의 차이를 발견하게 하고, 음미하게 한다.


하지만 <아가씨>는 이와 다르다. 두 가지 시선은 부족했던 서사의 구멍을 채우고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홍상수의 두 시점은 다른 반복이지만, <아가씨>의 두 시점은 같은 사건의 반복이다. 이 반복은 매혹적인 서사 장치가 될 것인가. 혹은 단순한 플래시 백이 될 것인가. 친절해서 아름답거나, 친절해서 지루하거나.



끝으로 박찬욱 감독이 구현한 여성 간의 사랑이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졌다는 해외의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아가씨>의 카메라가 취한 거리와 태도 중 어떤 점이 이런 반응을 불러왔을까. 이는 정당한 반응일까. 혹은 박찬욱 감독을 향한 무리한 과한 비판이나 비난일까. (<아가씨>를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등과 비교·대조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판단은 관람한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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