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Feb 17. 2024

'안티 히어로'가 던지는 씁쓸한 질문

'살인자ㅇ난감' 볼까, 말까?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더라" 영화만큼 유명했던 <해바라기>의 명대사다. 모두가 알듯 우리가 사는 사회는 법과 제도가 있고 이를 위반하면 벌을 주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물론, 이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활용해 죄를 은폐하거나 벌을 회피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 앞에선 누군가 나타나 절차를 무시하고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길 바라게 된다. 어둠의 기사였고 무법자였던 배트맨 같은 히어로를 말이다. 필연적으로 이 영웅에겐 개인이 어떻게 죄를 규정하고 벌의 무게를 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올 거다. 이에 '살인자ㅇ난감'은 살인을 저지른 악질 범죄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라 말한다. 

비루한 대학 생활 중인 이탕(최우식)은 늦은 밤 골목길에서 한 남자에게 폭행당하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게 된다. 그런데 현장엔 살인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고, 그는 용의선상에도 오르지 않는다. 더 놀라운 건 이탕 죽인 남자가 연쇄 살인범이었다는 것. 이후 이탕은 번째 살인을 은폐하려다 한 번 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지만, 현장에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의심조차 받지 않는다. 또한, 이번 피해자도 살인 범죄 이력이 있는 범죄자였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쫓던 장난감(손석구)의 레이더에 이탕이 잡히고, 증거 없는 살인 사건을 두고 살인자와 형사의 추격적이 시작된다.


<살인자ㅇ난감>은 신선한 조합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선, 주인공의 이력이 남다르다. 살인은 우리 사회가 가장 엄히 벌하는 범죄이기에 주인공이 '살인자'라는 파격적인 설정은 <살인자ㅇ난감>의 강한 동력이 된다. 범죄를 저지른 이를 중심에 세움으로써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이 주인공이 시청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탕의 능력과 괴짜 조력자 로빈(김요한)이 더해지면서, 더 신선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다소 비현실적인 이 캐릭터들이 드라마 속 리얼리티와 충돌해 균열을 만들고,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평범한 범죄물인 척하며 문을 열었던 이 드라마는 어느 순간부터 안티 히어로물로 그 장르를 바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신선한 이야기 강점이라지만, 드라마 초반부터 살인자의 행동에 이입하게 하는 건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 시청자에게 이탕의 범죄에 동조하고, 그를 응원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은 거부감 줄 수 있는 위험 요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살인자ㅇ난감>은 몇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가장 돋보이는 건 '최우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다. 그의 순수한 얼굴을 관통해서 만들어진 이탕은 여리고 연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20대 청년의 서사와 만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도 한다. 살인으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음에도 이탕은 평생 손해를 보고 살았을 것만 같은 왜소한 이미지로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한다.


다음으로 <살인자ㅇ난감>은 이탕의 특이한 능력을 내세워 살인에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능력 중 하나는 엄청난 운이다. 그가 우연히 죽인 이들은 하나 같이 악질 범죄자들이었다. 운 좋게도 이탕은 그런 놈들만 죽임으로써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이외에도 그는 범죄자를 판별할 수 있는 직감도 갖고 있다. 악질 범죄자와 대면하면 소름이 돋고, 이를 통해 처벌 대상을 판별할 수 있다. 이런 능력들은 이탕의 살인을 정당한 처벌로 느끼게 유도한다. 더불어 이 범죄-처벌의 알고리즘이 완성되면 이탕은 히어로물 영웅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선다. 대중영화 속 악당의 죽음에 관객은 애도를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빌런의 죽음 앞에서 환호하고 카타르스시를 느낀다. 이탕 역시 위에 선 심판자로서 그의 살인을 설득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살인자ㅇ난감>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청년이 정의를 대리 수행하는 안티히어로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에피소드가 전개될수록 이탕은 숙련된 암살자가 되어가고, 이에 따라 외형도 강인하고 날카롭게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늘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의 살인으로 누군가의 마음은 편해졌겠지만, 이탕은 '이것이 정의가 맞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살인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살인자ㅇ난감>도 무엇이 정의라고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이탕을 기준으로 두 인물을 비추며 양극단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안티 히어로에서 광기의 살인자가 된 송촌(이희준)과 법에 묶여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장난감. 이 사이 어딘가에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 없는 이탕이 있다.


'완벽한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 시스템은 가능할까?' <살인자ㅇ난감>은 흥미로운 이야기 뒤에 씁쓸하고 무거운 질문을 남긴다. 드라마가 끝난 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안티 히어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지금 왜 소비되고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는 것 아닐까.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세상이라면 안티 히어로는 필요 없을 테니까.

이전 06화 [아가일] 입담을 잃어버린 '데드풀' 같은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