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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Feb 10. 2024

[선산] 안개가 걷힌 뒤의 허무함

'선산' 볼까, 말까?

연상호 감독의 작품 속 세계에 관한 인상은 '불편함'이다. 좀비가 달려드는 기차, 초능력자가 활약하는 도시, 지옥으로 변해버린 세상 등 작품의 소재와 무대의 크기가 변해도 부각되던 건 그 안에 있던 인간과 그들이 구성한 조직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사회는 권력관계를 만들고, 그 안의 인간은 자신의 위치에 맞게 행동한다. 여기서 인간의 나약함과 이기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많기에 불편함이 동반된다. 연상호 감독이 기획과 각본에 참여했다는 '선산'은 또 어떤 특별한 세상을 조명하고, 우리를 불편한 감정으로 인도했을까.


'선산'은 한 통의 전화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경찰로부터 작은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서하(김현주)는 급히 영안실로 가게 된다. 그런데 서하는 작은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라 당혹스러운 상황. 게다가 작은 아버지는 타살 정황이 있고, 그의 죽음으로 서하는 가족이 가지고 있던 선산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더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레 나타난 영호(류경수)는 자신이 서하의 이복동생이라며 그 선산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밖에도 작은아버지 마을 사람들 역시 이 선산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후 서하의 주위엔 이상한 일들이 이어지고, 그녀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선산에 얽힌 비밀을 풀어야만 한다.

'선산'은 연상호 감독과 인연이 많은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 연출 이후 실사 영화를 고민하던 그에게 있던 두 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가 '선산'이었고, 가족의 존재에 관한 고민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한다. <부산행> 연출로 잠시 미뤄둔 이 이야기는 민홍남 감독을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민 감독은 '선산'을 '한국적인 이미지'와 '현실적이지만 기묘한 분위기의 공간' 등으로 채워나갔고, 덕분에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스터리 스릴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초반부에 서하가 작은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면 작은 농촌 마을이 등장한다. 이후 저 마다의 이유로 선산이 필요한 마을 사람들의 사연이 보강되면, 연상호 감독의 작품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집단의 폭력과 광기 등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선산'은 이런 집단과 개인의 구도 속에 이야기를 한정하지 않는다. 의문스럽고 때로는 기괴한 무속 신앙, 가족의 비극 등 다양한 요소를 가져와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한다. '선산'은 이들을 재료로 다양한 장르의 속성을 섞어 이야기를 더 긴장감 있게 끌고 간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안개 속을 걷는 위태로움. 이 모호함이 극도의 불안함과 긴장감을 형성한다.

살인 사건의 증거를 찾고 범인을 추격하는 형사물, 무속 신앙과 얽힌 기이한 현상을 파헤칠 땐 오컬트 등 선산을 감싼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초반부 흡입력이 상당하다. 흑막에 가려진 안타고니스트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워 퍼즐을 하나씩 맞춰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선산'은 이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엔 힘이 부족해 보였다. 선산에 얽힌 의문의 존재가 실체를 드러낼수록 이야기의 힘이 급격히 빠진다. 초반부 강렬하게 등장해 미스터리와 스릴을 만든 인물들은 중반부가 지나면서 너무도 맥없이 퇴장한다. 그들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선산'이 강점이었던 다양한 장르적 특성도 덩달아 하나씩 제거된다. 장르의 모호성이란 안개가 걷히면서 이야기를 유지하던 긴장감도 함께 날아간 거다.


'선산'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밀에 감춰져 있던 존재가 더 강렬했어야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안타고니스트는 드라마의 메시지를 보강하는 역할에 그치고 이야기를 정체시킨다. 이 캐릭터는 커져 버린 극적 긴장감을 견딜 만큼 압도적이지 않았고, 설정 역시 치밀하지 못해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선산'이 준비한 반전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아쉽게도 뒤의 이야기를 끌고 갈 동력을 만들지 못했다.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 치고 나가지 못해 답답했고, 긴 이야기를 완주한 뒤에 남는 감정도 허무함이었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음에도 이를 하나로 모이게 하지 못한 것 같아 더 아쉬웠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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