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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Feb 14. 2024

[아가일] 입담을 잃어버린 '데드풀' 같은 영화?

'아가일' 볼까, 말까?

첨단 기술이 집약된 무기,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 정보를 얻기 위한 변장 등 '첩보물'이라는 장르하면 생각나는 요소들이다. 지금의 관객에겐 이 장르의 오랜 전통을 지켜온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나 현대적인 주제와 현란한 편집을 장착한 제이슨 본의 '본' 시리즈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킹스맨'이 있다. 트렌디한 감각(혹은 광기)과 유머를 듬뿍 첨가한 이 시리즈엔 흥미로운 요원들이 등장해 웃음을 준다. 이렇게 히어로물과 첩보물 경계에서 색다른 재미를 줬던 매튜 본 감독이 이번엔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 선 주인공을 앞세운 영화로 찾아왔다.

높은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찬사를 받은 스파이 소설 '아가일'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엘리(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마지막 권의 결말 부분이 써지지 않아 고민 중이다.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기차에 오른 그녀는 괴한들에게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된다. 그때 자신이 진짜 스파이라 말하는 남자가 등장해 엘리를 구한다. 그리고 엘리는 자신이 소설에 썼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 스파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의 결말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 엘리는 생존을 위해 소설 속 아가일의 행동과 이 소설의 완벽한 결말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매튜 본 감독은 슬래셔, B급 농담 등 비교적 마이너한 감성을 대중 영화에 이식해 왔다. 더불어 그의 영화는 '저게 가능해?', '저렇게까지 표현해도 괜찮아?' 등의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면이 있었다. 한 예로 <킹스맨>은 수위 높은 질척한 대사와 피가 튀고 머리가 날아가는 파격적인 표현 등을 영화적 유머로 승화해 관객을 '낄낄' 웃게 해왔다. 보기에 불편할 수 있지만, 아무튼 즐기게 되는 이야기. 이번 <아가일>도 역시나 평범한 첩보물은 아니며, 잠입의 심리전과 스릴보다는 매튜 본 감독식 익살스러운 상상력과 현란한 액션이 돋보인다.

<아가일>의 전반부는 엘리가 소설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할 때 극적 재미가 증가한다. 현실의 에이든(샘 록웰)과 소설 속 아가일(헨리 카빌)이 교차 편집되며 액션 장면에 독특한 리듬을 만든다. 이후 영화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소설과 현실을 잇고, 이어서 파격적인 반전과 액션 씬을 만들어 낸다. 전반부엔 헨리 카빌의 힘과 강한 타격감이 부각된다면, 후반부엔 매튜 본의 기이함과 선이 강조된 액션이 잘 보인다. 특히, 두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형형색색의 연기 속에서 펼쳐지는 액션 씬과 아이스 링크를 연상케 하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액션 씬. 이들은 각각 발레와 피겨 스케이팅의 유연함과 우아함을 잘 표현한 동시에 매튜 본의 광기가 뿜어져 나오는 <아가일>의 귀여운 명장면이다.

  

영화의 장점으로 부각된 매튜 본식 연출은 <아가일>의 진입장벽이 되기도 한다. 이런 류의 유머에 익숙하지 않다면, 영화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장점이라 말했던 액션도 장난처럼 보여 흥미를 급격히 잃어버릴 수 있다. <킹스맨> 등의 영화도 이런 리스크를 가지고 있었지만, 매튜 본 감독은 이런 한계를 수위가 높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상쇄해 왔다. <아가일>은 애플 TV에서의 스트리밍을 고려했던 탓인지 여러 면에서 많이 자제하고 있어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매튜 본의 영화 세계로 한정한다면 이번 영화는 안정적이고 따뜻한 가족 영화 같았고, 이는 우리가 그에게 기대한 것이 아니다.

<아가일>은 몇몇 액션 씬을 제외하면 매튜 본이 자랑했던 색깔이 잘 보이지 않아 미지근해 보였다. 그라면 더 과감한 시도를 할 법한 장면들이 보여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장난'을 잊어버린(빼앗겨 버린) 장난꾸러기의 영화, 입담을 잃어버린 데드풀 같은 영화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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