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에 시작하는 지옥의 1교시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 아침 7시경, 저마다의 학교나 직장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어느 날이었다.
내가 지하철을 타는 역은 나름 출발역과 멀지 않아 앉을자리를 찾는 것은 그나마 쉬운 편에 속했는데 이것도 대개 출근 시간에는 무효화되는지라 앉을자리를 찾지 못하고 우두커니 선 채 1시간 20여분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역 몇 개를 지나더니 부지런한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어느새 지하철 내부는 빈틈을 찾기 어려워졌다. '오늘도 곱게 가기는 글렀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체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배가 심상치 않은 듯 요동치고 있는 듯했다.
중간에 내렸다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 방안은 지각이 확정되기에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단순한 배탈이겠거니 하며 일생에서 가장 강한 정신력으로 최대한 버텨보자는 다짐과 함께 뭐가 그리 신났는지 천장에 매달린 채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손잡이를 동아줄처럼 세게 잡았다.
그러나 몇 분 지났을까, 갑자기 눈으로 들어오는 시야의 가장자리 부분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사우나 불한증막에 있는 것처럼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 '위기탈출 넘버원'이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 내 몸에서 발현되는 증상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시나리오 특성상 대부분 결말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김 씨는 결국 그날 밤..)
그러다가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열차 안에서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갑자기 털썩 주저앉았는데 마지막 정신력으로 '이러다가 진짜 죽겠구나'하며 지각 걱정은 저 멀리 던져버린 채 목숨 걱정을 하며 좀비처럼 열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리고 간이 의자에 몇 분 정도 앉아있었더니 모든 것이 멀쩡하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결국 다시 다음 열차를 타고 억울함 가득한 지각을 한 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는데 자기 누나도 그런 적이 있다며 저혈압인 것 같다고 했다.
집에서 검색을 해보니 의외로 흔한 증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인지 지하철을 타기 무서워졌다. 그래도 지하철을 많이 타야 하고 서울까지 걸어서 갈 순 없는 노릇이라 스스로 임상실험(?)을 해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참 간사하게 보이겠지만 앉아서 갈 때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몸에 지장이 없는데 서서 갈 때는 20분 정도까지는 괜찮지만 이를 넘어서도 앉지 못하거나 사람이 많아지면 전에 나타났던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지하철을 타면 무조건 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고 내가 하는 선의의 자리 양보는 임신부이거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20~30분 전이 아니면 스스로 꺼리게 되었다.
지하철 자리를 양보하는 것, 지하철은 학교에서 소풍 갈 때나 한 번 탈까 말까 했던 나의 로망이었다. 임신부나 노약자를 보면 자리를 양보하고 애써 쿨한 척 휴대폰을 보면서 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내 지하철 통학 라이프를 벅차오르게 했었다.
하지만 이 로망은 결국 1년 정도 누리다가 멈췄다. 자리를 양보하고 그분들이 내게 해주는 감사 인사에서 보람과 뿌듯함을 느끼는 것도 이제는 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내 속사정도 모르고 양보를 강요당한 일이 있었다. 웬 어르신께서 지하철에 타시고 내 앞으로 오셨는데 나는 마음만큼은 양보하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었고 사람도 많았던지라 속으로 죄송함을 느끼고 있을 그때, 웬 아주머니가 "젊은데 양보 좀 해요!"라며 나를 쏘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결국 반강제로 일어나서 양보해드렸다.
뭐 키도 180이 넘고 젊어 보이니까 건강하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씀하신 것 같지만 내가 심장병이 있다는 것과 저 일화가 있었다는 내 속사정은 몰랐겠지. 양보는 반드시 해야 하는 행동이 아닌 단순한 선택사항이며 선행일 뿐이다. 사람의 속사정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함부로 강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만간 마스크를 벗어도 되는 때가 오면 스스로 훈련(?)을 해볼 생각이다. 서서 가는 것도 무리가 되지 않도록, 다시 양보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