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좋다.

by 이성룡

우리는 즐겁고 흥겨울 때, ‘얼씨구 좋다’를 외치며 기쁨의 축제를 즐기며 산다. 반면에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 비꼬거나 조롱할 때도 ‘얼씨구’를 외친다. ‘얼씨구 잘들 논다.’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얼씨구’를 서로 정반대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첫째, 흥에 겨워서 떠들 때 가볍게 장단을 맞추며 내는 소리, 둘째, 보기에 아니꼬워서 조롱할 때 내는 소리라고 나와 있다. 사실 최근에는, 첫째 의미는 국악이나 각설이 타령 같은 분야에 국한해서 주로 사용되고 있고, 둘째는 노년층을 중심으로 실생활에서 가끔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나의 경우, 판소리 공연에서 고수 또는 관객이 장단에 맞추어 ‘얼씨구’를 외칠 때마다 왠지 마음이 거슬렸었다. ‘얼씨구’의 둘째 의미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명창에 대한 무례한 행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십수 년 전부터 판소리를 배우면서 달라졌다. 판소리 선생님이 누가 소리를 하면 ‘얼씨구’로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 예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우리 판소리 동아리는 건배사가 ‘얼씨구’하고 선창하면 모두 ‘좋다’로 화답했다.


나는 ‘얼씨구 좋다’를 좋아한다. 이 얘기를 하려고 서설이 길었다. 아무튼 ‘얼씨구 좋다’를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애용했으면 좋겠다. 그 이유를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각설이 타령’으로부터 설명해 나갈까 한다. 이는 지금도 시장이나 축제 현장에서 흥겹게 공연되고 있고 누구나 알고 있는 타령이기 때문이다. ‘얼씨구’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격암유록의 한자 풀이를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얼씨구’는 한자 臬矢口(얼시구)로 설명한다. 여기서 얼(臬)은 해말뚝 얼로, 해말뚝은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재는 해시계의 말뚝이다. 그리고 시(矢)는 화살, 구(口)는 입, 드나드는 곳으로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는 것, 즉 ‘정확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시구(矢口)를 같이 쓰면 알지(知)가 된다. 그러므로 얼시구(臬矢口)는 시간을 아는 것, 즉 때를 안다는 의미가 된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때를 아는 것이 삶의 매우 중요한 지혜였다. 사실은 현재도 적절한 때를 안다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것이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얼’은 한글로 정신, 의식으로 확장되었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훈련병들 교육할 때 ‘얼차려(기합)’가 ‘정신 차려’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되면 얼굴은 얼이 드나드는 동굴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얼씨구’는 얼을 쓰고 즉 정신 차리고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제 ‘얼씨구 좋다’의 ‘좋다’가 남았다. ‘좋다’의 반대는 ‘나쁘다’이다. ‘나쁘다’는 ‘나뿐’, 나만 아는, 남이야 어떻든 나만 생각하고 나만 챙기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좋다’는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남도 생각하고 챙기는 것이다. 즉 ‘좋다’는 나뿐 아니라 나와 관계 또는 인연을 맺는 상대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얼씨구 좋다.’는 정신 차리고 조화롭다 즉 지혜롭게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모두가 좋은, 조화로운 지혜로 공동선을 실천하며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씨구 좋다’가 좋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얼씨구 좋다.’를 좋아하고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만 법대로, 잘 살면 되지 왜 굳이 ‘얼씨구 좋다’를 외치며 살아야 할까? 물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공동체 모두가 지혜롭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당연히 좋을 것이다. 그런데 찾아보니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센델도 공동체의 공동선을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가 왜 ‘얼씨구 좋다.’의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한다. 그의 공동선 개념은 영국 경제학자 핸더슨의 ‘Ehtical Markets’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GNP가 단순히 경제적 총생산(풍요)의 규모만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실제 GNP는 그림과 같이 “‘Mother Nature’의 토대 위에 당의(糖衣)가 입혀진 3층 케이크”와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측정하는 GNP는 토대가 되는 ‘Mother Nature’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우리의 유머나 용기, 지혜나 배움,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열정도 등과 같은 ‘Love Economy’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GNP의 규모와 분배 문제를 넘어 ‘Love Economy’의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생각해야만 하며 이를 위해 더 유기적인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thical Market_이미지.png 그림.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포함한 국민총생산(GNP)


한마디로 ‘얼씨구 좋다’의 신명 난 춤판, 즉 조화로운 지혜로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샌델은 이러한 공동선을 실천하는 사회를 위하여 다음 네 가지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

정의로운 사회는 인간의 자율성만 보장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선의 사회를 위하여 공동체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각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에 필요한 연대와 상호 책임 의식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공공 서비스의 양적 질적 개선과 투자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공립학교가 의무교육을 통해 시민교육을 담당하는데, 단지 시민의 미덕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경제적・종교적・인종적 배경이 다른 청소년들이 서로 차별이 없도록 같은 사회제도 안에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시민교육을 말한다. 이를 위하여 공립학교를 비롯한 공공 서비스에 민간 서비스 못지않게 과감한 투자를 하여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여유 있는 사람도 다 같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공공 서비스가 열악하면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이용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고급의 민간 서비스를 이용하며 이중과세라 불평하는 바람에 공공 서비스의 투자는 점점 약화 되어 공공과 민간의 서비스 격차가 벌어지는 악순환의 과정을 밟게 되고, 자연스럽게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발생하여 공동선을 추구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자유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공론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자유시장은 정의로운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매매, 대리모를 통한 임신과 출산 거래 등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행위를 자유시장에 맡기면 그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이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의롭고 좋은 삶의 사회를 위하여 공동선의 도덕적 가치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공개토론 및 이의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공동체 연대를 통한 불평등 해소

빈부의 격차가 큰 사회는 자연스럽게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첫째, 희생과 봉사의 시민의식’에서 기술한 것처럼 공공 서비스를 사회적 약자만 이용하고 부유층은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려 공공 서비스의 양적 질적 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결과는 첫째,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부자가 누진적 부자 증세를 꺼리고 불평하면서 재정문제가 악화하여 공공 서비스의 질을 형편없이 떨어뜨리게 된다. 둘째,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곳에 공원, 시민회관 등의 공공시설이 들어서지 않음으로써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이 심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시민 연대 의식이 약화하는 악영향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좋은 삶의 사회를 위하여 적어도 공공의 영역에서만큼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삶에 기반이 되는 공공시설과 공공 서비스들을 민간 서비스 이상으로 재건하는 것을 공동선의 목표로 삼아 이를 제공하는 것에 공동체가 합의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넷째, 도덕에 기초하는 사회

도덕적・종교적・사회적 신념에 따른 서로 다른 의견은 ‘낙태 금지법’ 사례처럼 좀처럼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개인의 신념에 사회가 어설프게 개입한다면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한 상호 존중의 토대를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공동체 안의 동료들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종교적・사회적 신념에 따른 서로 다른 의견을 애써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공동선의 도덕에 기초해서 공감을 끌어내도록 더욱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를 회피하는 그것보다 경제적・종교적・인종적 차별 없이 공동체의 연대감을 높이는 데 더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한 공동선을 확립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센델의 제안은 ‘얼씨구 좋다’의 신명 난 춤을 추는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가 검토하고 노력하고, 추구해야 할 숙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함께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열심히 숙제합시다.





* 위 글 중 마이클 센델의 공동선에 관련한 내용은

브런치북 “나뚜라”[https://brunch.co.kr/brunchbook/hyunso2]

15화 ‘3.1 가야 할 길(道) : 행복_4’에서 발췌,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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