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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19. 2024

보통의 가족

ORDINARY KOREAN FAMILY

감독  허진호

각본  허진호, 박은교, 박준석

원작  헤르만 코흐 - 《The Dinner이바노 데 마테오 - 〈더 디너

제작  김원국

의상  최의영

촬영  고락선

조명미술  모소라

편집  김형주

음악  조성우

출연  설경구(양재완 역), 장동건(양재규 역), 김희애(이연경 역), 수현(지수 역)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 하이그라운드

제공/배급  하이브미디어코프마인드마크

촬영 기간  2022년 7월 2일 ~ 2022년 9월

개봉일 2024년 10월 3일(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2024년 10월 16일

화면비  2.39:1

상영 타입

상영 시간  109분 (1시간 48분 34초)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진지하게 몰입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장동건과 설경구의 목소리 톤이 너무 달라서? 김희애의 연기가 너무 격정적이어서? 수현이 너무 겉돌아서? 이걸 모두 의도적으로 연출해서? 


  피곤하고 단순한 스토리

  재완은 살인자도 무죄를 받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다. 그의 동생 재규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의사다.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재완에게 정의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동생 재규는 바르게 사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형수가 죽고 젊은 여자를 후처로 들인 형의 처사가 못마땅하다. 그건 프리랜서 번역가인 그의 아내 연경도 마찬가지다. 한참 어린 지수에게 형님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보통으로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다. 이들 형제에게는 각각 딸과 아들, 한 명씩의 고등학생 자식이 있다. 이들이 노숙자를 무차별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범죄를 저질렀고, 그들의 폭행현장이 CCTV에 찍혀 인터넷에 돌고 있다. 이들 가족들은 이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자녀라는 것을 금방 알아본다. 스토리는 이게 다다. 

  부모가 자녀의 범죄 혹은 사고에 대처하는 자세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인들은 대단히 감정적인 민족이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성정을 가졌다는 말이다.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나'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철저히 법과 원칙을 내세워 정의를 세우려고 하지만-이때 정의를 세우고자 불의에 맞서는 방식도 역시 감정을 총 동원한다-그 사건이 나의 신상과 관련되어 있다면, 더구나 자식이 범죄의 당사자로 인생을 망칠지도 모르는 국면에 처했을 때, 극도의 이기주의와 몰염치, 보호본능에 전력질주하는 부모로 돌변한다. 이것은 부모 자신이 가진 한국사회 적응철학과 새끼를 보호하고자 하는 동물로서의 부모가 가진 본능이 결합하여 더 극단적이고 처절한 생존의지로 정착한, 현실적응과 동물본능이 어우러진 상승효과의 결과다.


  법철학이 역전하지만

  법은 내적 도덕성의 요청(풀러)이라거나, 최소한의 도덕(옐리네크)이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법철학의 요소에는 도덕성이라는 가치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도덕성은 강제할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이지만, 어떤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집단 구성원들의 교육과 삶에서 강조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무형의 도덕은 유형의 실천명제인 법으로 정착된다. 이런 법을 삶의 도구로 삼아 살아오던 재완이 법철학이라는 법적 양심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점에 봉착한다. 이것은 결국 재완의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지만, 생명을 다루는 재규는 살려야 한다는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데 형제의 갈등은 극한 대립에 놓인다. 법은 정의와 양심의 이름으로 대상을 죽여야 하고, 의술은 어떤 이유나 조건도 없이 무조건 생명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변호사와 의사가 싸운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 어떻게 이길 것 같은가? 이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게 두 형제는 반드시 파멸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보통의 가족' 구성원들의 내적 대립은 '그들만의 공동선(共同善)'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 버렸고, 이들을 밖에서 쳐다보는 '우리의 공동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가족은 사회적 해악이다.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 그 기준에 따라 솔루션도 달라질 것이고, 따라서 결과도 다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감독이 내린 그런 결론이 꼭 나의 결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화려한 연출 뒤에 숨은 것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대사를 통해 죄다 보여줘 버렸다. 우린 이런 걸, 드라마라고 한다. 침묵이 더 많은 대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침묵이 오히려 관객의 가슴을 치고 생각의 문을 열게 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드라마로 전락해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다. 대다수의 한국 관객들은 이런 류를 좋아한다. 이런 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 혹은 자신의 문제로 문제화될 수 있는 소재를, 주고받는 극단적 대화로,  극단적 결말이라는 충격을 주는 드라마를 이미 많이 경험했기에, 그것의 총체를 묶어서 말한 것으로써의 '류'다. 

  익숙한 것으로 충격을 주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속속 사용했다는 얘기다. 익숙한 것들의 기계적 결합, 그래서 배우들이 모두 겉돈다. 카메라가 모든 배우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원작을 극화하는 데만 치중한 연출 화면에는, 그래서 미장센이 없다. 그래서 생각할 거리도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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