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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15. 2024

장손

삼대의 그늘


감독 오정민

출연   승필 (우상전) - 1대, 태근 (오만석) - 2대, 성진 (강승호) - 3대 

         말녀 (손숙)-할머니, 혜숙 (차미경) - 고모, 수희 (안민영) - 어머니, 

         옥자 (정재은) - 작은 고모, 동우 (서현철) - 옥자의 남편, 

         미화 (김시은) - 성진의 누나, 재호 (강태우) - 미화의 남편

각본 제작  오정민, 장지원, 정조은

촬영  이진근

편집  오정민

음악  장영규, 정중엽

제작사  영화사 대명

배급사  인디스토리

개봉일  2024년 9월 11일

상영 시간  121분

제작비  6억 원

상영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장손의 영화적 근거는 1996년에 만들어진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와 임권택의 '축제'에 있다. 이 보다 앞서 1984년에 개봉한 이두용의 장남이라는 '영화'도 있다. 80년과 90년, 그리고 2024년의 시간차는 많은 것을 메꿔야 할 필요가 있는 간극을 가지고 있다. 

  80년대가 그래도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하고 있었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오렌지족의 등장과 함께 X세대가 시대를 대변한 신계층의 시대였다 할 수 있다. 즉, 80년대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나온 영화들이 90년대의 위 두 영화라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훼손되는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강한 영화들이었다. 심지어 학생부군신위와, 축제는 아예 한국 장례문화를 기록하기 위한 교육용 다큐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일종의 독재자의 자서전같은 기록물 역할을 했다. 다만 한가지 예술적 타협점으로 거론되는 것은 거기에 카니발적 행태를 보이는 한 가족의 장례의식이 지배하는 드라마를 가미한 것.

  전통의 가치는 보존과 계승에 있다. 세 영화 모두 이에 충실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그 전통적 가치는 가족에 대한 옹호다. 장남의 고충에 대해 옹호하고, 효에 대해 옹호한다. 그 바탕에 가족이 있고, 가족 안에는 전통적 가치, 기득권의 유지라는 정치적 어젠다가 숨어 있다. 

  더 멀리 가보자, 30년대 염상섭의 '삼대'가 있다. 차라리 이 작품이 '장손'에 가깝다.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로 이어지는 삼대는, 구한말의 인물 조의관, 개화기 세대로 미국유학까지 갔다 온 조상훈,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온전히 일점강점기 세대인 손자 조덕기는 그대로 장손의 캐릭터들과 온전하게 겹친다. 광복과 좌우 대립의 6.25를 겪으면서 보모를 여읜 세대인 할아버지 승필은 집안을 지키려는 세대, 아들 태근은 도시에서 대학물 먹고 학생운동에 몰두하다가 내려와 가업계승을 놓고 아버지 승필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좌파운동권 세대, 손자 성진은 영화 찍는다고 집안 재산을 축내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절대 신뢰를 받고 있는 가문계승자인 세대, 이 모든 모양새가 영판 염상섭의 삼대다. 

  지키려는 자, 인정받고 싶은 자, 도망치고 싶은 자, 이들의 관계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피해자, 피해자, 피해자.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딱 '놈놈놈'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의도로 자식을 키웠는데, 그 자식이 나를 부정하는 나쁜 놈이 되어 있고, 그걸 내 일과 관계 없다고 바라보는 이상한 놈의 집합이다. 그런 이상한 놈들의 가계를 보듬는 존재가 할머니와 며느리, 원래 이집안 피도 아닌 타성받이들, 여성들이라는 점. 그런 게, 가족이다.

 

  핸드헬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고정카메라로 일관되게 찍었다거나, 하필 두부공장을 가업으로 정했다거나, 생산되는 두부의 상호가 '대명'으로 찍혀있다거나, 사계 중 봄을 의도적으로 뺐다거나, 승필의 아내가 묻힌 선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었다거나, 하는 강력한 의도들이 모두 희석되어 가라앉아 버리는 것은, 감독이 아무리 예술적 장치를 그럴듯하게 쏟아부어 어떤 의도를 내포시켰다 하더라도 관객에게는 그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의도의 오류'에 빠지게 만들거나 단순히 좋은 '발상'으로 치부될 수 있는 소지가 영화에는 언제든 있다는 것이다. 만드는 것과 보는 것이 확연히 다른 접점에 있다는 것을 양 쪽 모두 인정해야 한다.

  물론 MZ세대의 시대에 지켜야 할 가족적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 MZ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90년대부터 2024년 현재까지, 혹은 1930년대에서 2024년까지, 우리가 살아온 한국사회는 가부장이라는 봉건적 가족제도의 상징이었던 호주제가 폐지되었고,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어쩌면 이런 시대에 감독은 관객의 뒤통수를 치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가족은 없어지지 않는 거라는 걸, 이 시대에 강변하고 있는 장면을 오정민이 만들어 내고 싶었을 것이다. 

  딱 한마디만 사족처럼 덧붙이자면, 의도야 어떠했든, 관객의 기대와 비판이 어떠했든 간에, 성진이 통장을 가지고 튀는 이상한 놈이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에 이 영화를 받아들여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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