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타인의 공포
현실의 삶을 그냥 현실이라고 하자. 현실을 한 치 삐끗 어긋나게 만들어서(어긋나게 하는 데도 여러 기술이 있겠지만) 예상 밖의 결과물을 제시했을 때 웃음이 유발되면 코메디가 되고, 긴장을 유발하면 스릴러나 공포가 된다. 그래서 코메디와 공포는 정말 한 끗 차이다.
공포를 제공하는 방식은 좀 전통이 있다. 과거 허리우드 영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갑자기 전환된 화면과 함께 놀라게 하는 음악(소음에 가깝다)이 주요소를 이루었다. 관객의 경기를 유발하게 한 것. 그건 오락적 요소로서의 공포였다. 납량특집이 유행했던 적, 오락이 적었던 시절 기획하여 의도적으로 특정 계절마다 납품했던 시절 얘기다. 그 떄는 공포도 하나의 오락이었던 듯 싶다.
그러나, 결코 오락일 수만은 없는 공포는 현실이다. 우리는 매일 공포와 공존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 중 가장 흔한 공포가 '타인'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몇 년째 지하철 빌런들은 유튜브를 떠돌며 회자되고 있고, 어떤 이는 종합본을 만들어 공포를 희화하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대상 자체가 공포인 경우가 바로 타인이라는 얘기다.
타인은 왜 우리에게 공포인가, 그들에 대한 정보를 모르기 때문이고, 정보를 몰라서 두려운 대상의 이면,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죽음 역시 우리는 손에 든 정보가 없다. 그래서 타인과 죽음은 공포로 연결된 자웅동체와 같은 생물이다.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오랜 숙원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고, 과학이 점점 깊은 곳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는 어둠의 영역을, 아는 밝음의 영역에 가져다 놓는 것. 영화는 종교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예술이되어야 한다면, 그건 인간의 영역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오후 네시'가 있다.
소위 말해 민폐를 끼치는 빌런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빌런이 의사다. 뭔가 깊은 의도와 의지가 숨겨져 있을 수있다는 설정이다. 또 그런데, 이 옆집 사는 의사는 정인의 집에 와서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그게 민폐다.
그냥 오후 네 시에 문을 두드리고, 차를 얻어 마시고, 말 없이 앉아서 두 시간을 보내고 묵묵히 돌아갈 뿐이다. 시골 생활이 처음인 정인과 현숙은 불편하고, 그 불편함은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이들을 방문한다. 오후 네시가 두려워지고, 정말로 경기를 하게 되고 딸꾹질을 하게 된다. 어떤 점잖은 방법으로도 옆집 남자의 방문을 막을 수 없고,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의 방문은 어김없이 오후 네시의 문을 두드린다. 공포가 열리는 지정된 시간이다.
살면서 불편한 결과물과 마주친 것, 타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타인'이다. 예측불가의 행위나 말을 하는 '타인'과는 차별성이 있는 '타인', 공포를 가슴 깊이 심어주는 존재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자주 목격한다. 친척간 모임, 집안 행사 등에서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는 거기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가끔 그림자처럼 눈 앞에 띄었다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말끔히 사라진 존재들, 주변을 돌아보면 얼마든지 사례를 찾아 낼 수있을 정도로 친근한 캐릭터다. 그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해한다거나,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사라지는 일이 전부다. 그들은 그들 나름 예의를 다하고 있는 것인 줄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알 수는 없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이 우리를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옆집 남자의 (방문 자체가 폭력인) 방문으로 인해 정인 부부는 일상을 즐길 수가 없다. 수양딸같은 제자 소정이 바쁜 와중에 찾아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옆집 남자의 방문으로 엉망이 되어 버리고, 소중한 관계가 파탄이 나버리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마침내 분노한다.
예의나 예절, 지식인으로서의 품격으로 가장된 분노는 살인으로 치닫고, 그 대가로 세라의 몸에 눌려 죽음을 맞이 한다는 결말을 보여준다. 스토리를 이어나가다보면, 뜻하지 않은 전개를 쓰게 되고 그걸 꾸역꾸역 이어나가다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다. 그런 경우가 '오후 네시'다.
결국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개연성의 눈으로 작품을 쳐다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소정과의 관계가 파탄나는 정서와 불편함이 살인으로 넘어가는 전환을 납득할 수 없다. 우리 정서로는 비약이 큰 스토리전개다. 그래서, 이런 전개를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숨겨진 정체라거나 하는 쪽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설득력이 없기때문이다. 내게 공포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은 끝까지, '왜 저래? 그냥 경찰에 신고하지!' 하는 반응이 전부다.
이 영화는 정인부부와 육남의 관계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갔어야 했다. 사고가 자살로 오인되고, 인명구조가 살해실패로 오인되면서 내적갈등이 표면화된다. 결과는 두 대상의 파국. 스토리전개를 과도하게 비약시켜 공포를 극대화시키려했지만, 실패했다.
이 영화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소는 메인스토리를 끌어나가고 있는 오달수에게 있다. 그동안 오달수가 보여온 연기들은 정극에 웃음을 가미하는 요소로 활약한 바가 굳어있고, 꼭 그래서이기 보다 그가 사용하는 어눌한 말투와 익숙한 어조는 은퇴한 교수로 명상을 즐기고 지적 대화를 나누며 원숙한 성품을 가진 캐릭터로서의 역할에 부적합하다는 인상을 준다. 즉, 정인을 통해 현실과 내면의 갈등이 드러나야 하는 스토리다. 거기에서 실패하면 영화도 실패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 정도에 그치지만, 이걸 외국인들이 본다면 또 달라진다. 왜냐하면 대사는 자막처리되고 그 특유의 억양과 인상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나다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거나,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다는 소식은 크게 놀랍지 않은 사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