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산의 정기

by 별사탕

태권도를 가르쳐준다는 정팔이 형은 기름종이로 벽을 바른 집에서 살았다. 도로를 놓을 때 위에 녹여서 바르는 아스팔트를 미제 빨락 종이에 발라 그걸 벽에 붙이면 돌처럼 보이고, 겉보기에는 검은 돌담으로 된 번듯한 집처럼 보였다. 그래서 기름종이의 안쪽을 들춰내보면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엮듯 등성하게 테두리를 엮은 걸 확인할 수 있다.

차범근이 축구한다는 날이었다. 연애바위로 모이라는 말이 돌았다. 우리들에게 태권도 품새를 가르친 정팔이 형의 말이었다. 겨울 밤길이 무서웠던 동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산길을 걸었다. 지주집을 빙 돌아 산길을 걸었다. 똥밭을 지나 길가에 풀을 밟아가며 밭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갑자기 아이들이 와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숲 속에 정팔이 형이 숨어 있다가 아이들을 놀래주려고 갑자기 뛰어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정팔이 형은 장난을 잘 쳤다. 그리고 핫둘을 외쳐가며 연애바위를 향해 산길, 밭길을 걸었다.


너그들 쉬파람 불어 봤나? 내가 가리키 주까?


정팔이 형은 아랫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앞으로 잡아 빼며 위로 올려붙였다. 그리고 숨을 빠르게 들이쉬자 쒝하며 날카로운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이들은 모두 환호했다. 너무나도 신기했던 우리는 정팔이 형이 알려 주는 대로 따라 했다. 소리를 낸 아이들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즐거워했다.

두 손을 모아 엄지 사이에 만들어진 틈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부엉이 소리를 만드는 건 동네 아이들에게 익숙한 놀이였다. 밤놀이를 할 때 누구의 집이랄 것 없이 아무 집에나 가서 부엉이 소리를 내면, 그 집에 사는 아이가 튀어나왔다.


이래 쒜엑 하믄 여자애들이 치다본다 아이가, 그때 눈을 이래 찔끔하는기라.


낮에 다니는 공장 이야기였다. 정팔이 형이 다닌 고무신 공장은 마을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도 1시간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공장단지라고 했다. 전봇대보다 큰 굴뚝들이 여기저기 우뚝 서있고, 커다란 철대문으로 굳게 잠긴 자기들은 한쪽에 열어둔 작은 문으로 들락거린다는 공장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공장 마당엔 또래 아이들로 가득 차 공을 차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여자들은 무리 지어 산책을 하기도 하고 공장마당가 한쪽에 붙어 서서 남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구경하고 서있다고 했다. 모두 자기처럼 학교를 못 다닌 아이들이 스무 살이 넘어서 다니는 곳이라고 했다. 너희들도 좀 더 크면 자기 공장에 올 수도 있다고 했고, 어떤 애들은 지금도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정팔이 형의 말에 솔깃했지만, 집을 떠난다는 것이 상상밖의 일처럼 여겨졌다.


007 영화도 보여준다 아이가?


그러면서 정팔이 형은 황금으로 만든 총과, 차바퀴에서 총구가 나와 적들에게 갈겨대는 장면을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이래 길을 가다가, 팍! 이래 도는기라. 그라고 탕!


007이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영화라곤 입때껏 한 번도 구경을 못했던 터라 시내의 거리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별별 것이 다 있고, 공장에 다니는 여자애들과 남자애들로 득시글거리는 진풍경을 연상했다. 그리고 영화라는 것이 있어 그걸 보여주는 집도 따로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강철 이빨이 철문을 때려 부시믄서 이래 주먹을 쥐고 덤비온다!


정팔이 형은 위아래 이를 드러내고 주먹을 얼굴 옆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을 향해 우왕 하는 소리를 내며 두 팔을 뻗어 아이들을 덮치는 시늉을 했다. 그의 동작에 따라 아이들은 으악 하며 함께 휩쓸려 놀라 발버둥을 쳤다.

나는 정팔이 형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시시하게 보였다. 다만, 진짜 시내의 모습과 진짜 영화가 몹시도 궁금했다. 그리고 그가 왜 말할 때의 발음이 뭉글어지고, 눈빛은 또 왜 흐려지는지 그것도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가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술이라면 아버지가 어쩌다 들어오신 날이면 입에서 콜콜하게 단내가 풍기던 것을 기억했다. 일정 그런 냄새는 나지 않았음에도 그는 눈이 풀려 있었고, 발음이 어눌해져 있었다.


우린 모두 하나의 목소리로 앞지르기를 했다. 하나! 정팔이 형이 질러대는 기합에 맞춰 힘차게 팔을 뻗으면 정팔이 형은 우리에게 다가와 틀어진 어깨를 바로잡아주었고, 주먹을 바로 쥘 수 있도록 다시 펴서 말아주었다. 둘! 하면서 흩어진 정신을 바르게 잡아주었다. 잡생각을 버려야 바른 몸동작이 나온다. 너희들의 몸이 틀어진 것은 마음이 틀어져서 그런 거다. 셋! 부모님이 너희들을 기를 때 애지중지하던 마음을 기억해라

이런 식의 태권도 교육이 연애바위 위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차범근 축구를 본다 이기야!


정팔이 형이 우릴 바위 위에 앉혀 놓고 마을 아래 축구장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작은 라디오를 켰다. 아나운서의 중계가 본격적이었다. 누가 공을 몰고 가는지, 누가 누구에게 패스를 하는지 생생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저 밑에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축구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라디오방송과 운동장에서의 축구가 연결되는 현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재떨이 만한 타원 안에 22명의 선수가 뛰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누가 차범근인지 알 수 없는 개미만 한 크기였다. 그래도 우리는 차범근이 공을 잡고 달릴 때에는 다 함께 소리치고 환호했다. 아나운서가 슛하고 외칠 때, 우린 모두 숨을 죽였고, 아! 하는 실망과 함께 아나운서의 노골이라는 소리가 아쉬움에 섞여 중계되었다.

나는 다만, 지금 우리 동네엔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한 명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집에 아이들이 한 명도 없다, 이 한밤중에 아이들이 없는 집에서 어른들은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평소 나는 뭘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숙제를 하거나, 이건 해야 할 숙제가 많을 때 그랬고, 보통은 만화책 보고, TV 보고, TV가 꺼지기 전에 잠들었다. 지금은 만화책보고 TV 볼 시간이었다. 집에서 어른들과 늘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장면에 우리만 없어졌으니, 어른들은 그 시간에 다른 집에 놀러 가서, 한 집에 모여 놀기도 했다.

차범근이 한골을 넣자 우리도 바위가 덜썩거리도록 고함을 쳐댔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며 서로의 손바닥을 쳐대기 시작했다.


구룡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여기 모였네 우리의 신성

나가자 싸우자 신성의 별들

이기고 돌아간다 신성중학교


정팔이가 갑자기 노래를 불렀고, 우리들은 그가 부르는 노래를 모두 함께 따라 불렀다. 아마도 그가 나온 중학교의 교가 같았다. 우린 졸지에 신성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구룡산은 이 마을과 저 아래 동네 전부를 떠받치고 있는 뒷배경과도 같은 우리 모두의 산이 이었다. 그래서 그게 신성중학교가 되었든, 신성고등학교가 되었건 중요하지 않았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 우리의 정신을 지탱해 준다고 믿었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 대문이 따로 없었던 집, 산에 널린 돌을 쌓아 집의 기초를 닦았던 집, 바람이 새들어와 기름종이를 발라 나무벽을 발랐던 집, 그 집으로 쑥 들어가 발을 뻗고 누우면 발목이 집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은 흥부네 집 같았던 집, 그 집에 정팔이 형이 살았다.

눈이 게게 풀리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갈지자로 마을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올라갈 때, 마당에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호랑이 흉내를 낸다고 어흥하며 아이들을 덮치는 시늉을 할 때, 아이들이 꺄악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질 때 멀리서 바라보던 아줌마 하나가 중얼거렸다.


쟈는 주사를 잘 못 맞았나, 약을 잘못 먹고 왔나?


구룡산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봉우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꼭대기에 가보면, 커다란 바위가 괴석의 모양으로 정상위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마치 바다 쪽을 향해 활을 쏘고 있는 궁수이거나 말을 타고 있는 장군의 형상으로 보였다. 바다 너머에는 일본이 있다고 했다.

나도 이제 구룡산이 정기를 내려준다는 중학교 뺑뺑이 돌린 결과를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를 들을 때쯤, 정팔이 형은 마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태권도를 가르쳐주고, 태권도 정신을 심어주었으며, 축구중계방송과 실제 경기를 연결시켜 입체적인 축구 직관을 도왔던 정팔이 형이었다. 학교 갔다 오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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