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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9. 2024

사랑의 탐구(The Nature of Love)

정신의 쾌락과 육체의 쾌락

감독 : 모니아 초크리

출연 : 마갈리 레핀 블롱드(소피아), 피에르-이브 카르디날(실뱅 역),

         프랑시스-윌리엄 레움(자비에르), 모니아 초크리(프랑수아즈)

개봉 : 2024.09.18.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멜로/로맨스

국가 : 캐나다

러닝타임 : 112분

배급 : 티캐스트

수상 : 2024 49회 세자르영화제(외국어영화상)  

                  

추운 나라 퀘벡의 공식언어는 프랑스어다. 그래서 이 영화도 불어권의 영화다. 이쪽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좋게 보면 논쟁적이요, 나쁘게 보면 아주 대놓고 싸우려는 모습들이다. 그들의 부정확한 콧소리와 목구멍소리들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든다. 영화에 대한 객담부터 늘어놓는 이유는 이 영화가 그만큼 논쟁적일 수 있다는 뜻일 게다. 특히 결혼과 연애, 출산의 문제로 노답상태인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한 마디로 로코다. 거기에, 다층적 클로즈업 장면은 코믹적 요소로 작용한다. 자연풍광 묘사나, 순간 클로즈업의 기법은 매력적인 애로 영화를 만든 틴토브라스를 연상시킨다. 카메라 무빙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장에서 감독만 따로 떼서 봐야 할 것 같다.

흔한 소재를 사용할 때, 식상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장치를 만들어야 하는데, 첫째가 소재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회피하면 된다. 예를 들어 불륜이 소재라면, 불륜을 회피하면 된다, 그런 식. 두 번째 장치는, 내용을 무겁게 하는 것. 세 번째는 이 두 가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총동원한다. 물론 그 한계는 어디에 드러나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불륜을 정당화하는 방법

  소피아는 대학에서 주로 은퇴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학 개론을 강의하는 철학교수다. 우리로 치면 평생교육기관의 교수로 있는 지식인이다. 그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예술의 문제, 철학의 문제, 인간의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걸 일상생활화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다름을 이해하고 각자의 예술론을 피력하는 것을 즐겨한다.

  모든 생활이 만족스럽다. 딱 하나, 남편 자비에르와의 각방 생활이다. 그렇다고 딱히 그것을 불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소피아의 현재생활은 만족스럽다.    

  별장 수리차 시골에서 만난 실뱅은 시골의 인테리어 업자다. 그가 사람을 이끄는 능력은 대단하다.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 특히 여자에게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되는 마력을 지닌 존재다. 둘은 선을 넘었다. 그리고 지속되는 둘의 애정행각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절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소피아는 자비에르에게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고백하고, 둘은 10년 결혼생활을 청산한다. 살면서 한 번쯤은 겪을 법한 불륜 스토리다. 그만큼 개성 없는 불륜이라는 뜻이다.

  이걸 플라톤과 쇼펜하우어의 사랑관에 빗대어 불륜의 무게를 덜어낸다. 이제 불륜이 문제가 아니다. 불륜이 사랑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플라톤과 쇼펜하우어가 맞붙는 불륜 

  소피아가 불륜을 저지른 바로 그 순간, 자비에르와의 이상적인 사랑은 물 건너가 버렸고, 플라톤과도 결별하게 된다. 실뱅과 만나면서 소피아는 쇼펜하우어를 옹호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했다.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생명현상의 근원으로 파악했듯, 사랑을 삶의 에너지원으로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존에 부정적으로 보았던 육체적인 사랑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형이상학적 이상과 분리된 세속적 사랑은 만천하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생명수로 취급하게 된 것이다. 한 단계씩 건너 올라오면서 소피아는 너무도 현실적인 감정이라는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철학자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써먹는다. 철학교수식의 자기 합리화다.

 

스피노자가 정당화시키는 불륜

  이제 스피노자가 등장할 차례다. 스피노자는 '욕망 없는 사랑'까지도 가능하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면, 도대체 사랑의 본질적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사랑에 이제 고결한 정신은 사라지고, 뜨거운 피가 도는 육체만 남은 듯하다. 그걸 쾌락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랑이라고 부르는 시대가 된 것, 이렇게 사랑의 형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소피아가 체감하는 사랑(불륜)의 폭도 넓어지며 대담하고 도발적으로 발전한다. 스스로 목에 건 목줄의 끈을 실뱅의 손에 넘겨주며 그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모습으로 전락할 때는, 단지 이 영화가 볼 거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이 가지는 주종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씨 뿌리는 남자 실뱅을 인지했지만, 그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소피아의 심리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이지만 사실적이기도 하다. 복잡한 여자의 심리가 사랑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훅 들어오는 훅스, 선택이 본성 

  사랑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의 대상이라는 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선택체라는 것, 그래서 이제 대상을 어떤 기준이나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초적인 남자 실뱅의 질투, 그로 인한 잠시동안의 결별, 소피아는 애타게 실뱅을 찾지만 결국 대답이 없고, 그 빈자리를 '선택' 당한 자가 채우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한다.

  종의 선택, 다윈의 핵심이다. 모든 생물은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쳐 종으로 정착하게 된 것, 성별을 선택한 것이 차별의 선택은 아닌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특정 역할에 예속당한다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데 이르러서, 소피아는 실뱅의 반지를 던져버리고, 춥고 외로운 주유소 한 복판에 남겨진 존재가 되어 버린다.

  자비에르, 실뱅, 기타 모든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 소피아. 그녀가 온몸으로 찾아 헤매는 것은 사랑의 본성이다. 그걸 찾아야만 그녀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생명만큼이나 오래된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의 문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양철학사의 큰 줄기,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든, 육체와 정신이든, 몸과 마음이든, 어떤 단어를 쓰더라도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정육의 분리의식은 뿌리가 깊다.

  일단, 자비에르를 소피아의 정신이라고 말한다면, 실뱅은 소비아의 육체다. 인간이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파기하고는 생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이분법은 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극 중의 소피아는 정신도 버렸고, 육체도 버린 꼴로 홀로 남게 되었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눈발이 흩날리는 캐나다 퀘벡의 매서운 한파 속에서, 소피아는 홀로 남겨졌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스스로 선택한 노정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소피아는 훅스의 말처럼, 성적 테두리 안에 남겨진 편견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 박힌 성적 역할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설왕설래의 소리로 꽉 찬 방

  온갖 무거운 것들을 다 내던져 버리면, 한국인들의 입버릇만큼이나 흔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 이 영화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남긴 것은 장면 선택과 대사에 있다. 실뱅과 소피아가 벌이는 격렬한 정사씬의 화면구성과 관객의 숨이 함께 막힐 듯한 배우들의 숨소리는 과히 새롭다고 할 만큼 인상적이다. 이러한 음향과 특정부위 확대샷, 거기에 엿보는 카메라 앵글은 감독의 특정 페티시가 반영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아하!

  소피아 집안의 식구들과 실뱅의 식구들이 식탁에서 보여주는 대화의 대비, 소피아와 그녀의 모친과의 대화,  이런 것들은 감독이 주제를 초점화하기 위한 미장센 구성으로 굉장하다고 극찬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을 보여주었다는 점, 파노라마처럼 흩어져있는 한 명 한 명이 보여주는 살아 있는 대사들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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