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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08. 2024

스펜서

깨진 진주 한 알

 

  다이애나 스펜서, 우리가 알고 있던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성이 제목이었다. 알았더라면 안 볼 걸, 하면서 타이틀 롤이 넘어갔다. 첫 장면, 한 그루 나무가 저 먼 데를 향하듯 가지를 뻗고 있고, 마치 동산처럼 보이는 그 먼 곳의 끝에 담장이 쳐져 있고, 화면의 초점은 카메라 아랫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시야가 멀어질수록 초점이 나간 정지 장면이다. 다이애나의 삶이 미래가 없음, 과거와의 극단적 단절임을 직시할 수 있는 상징적인 첫 장면이다.     

  의전을 무시한 다이애나가 혼자서 포르셰 오픈카를 몰고 시골길을 가는 장면이다. 그녀의 선글라스 테 위로 샤넬로고가 보인다. 주유기가 보이는 어느 카페에 들어선 그녀에게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모두 함께 '다이애나'를 외치듯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는 카운터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 

     

  Where am I?     

  다이애나의 현 상태를 나타내는 바로 그 말, 축약되고 압축된 그녀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영화가 끝까지 가지고 가는 화두에 해당한다. 

  그녀가 길을 잃었던 것, 다시 길을 찾아가던 그녀가 차를 멈춘 곳은 푸른 잔디가 깔린 동산, 먼 언덕 위에 허수아비가 서있고, 마주 오던 짚이 다이애나의 차 앞에 역시 마주 보고 선다. 다이애나가 아는 사람이다. 그는 샌드링엄 별궁의 요리사, 댄이다. 

  궁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 다이애나는 이미 늦었고, 댄의 만류에도 다이애나는 동산을 뛰어 올라간다. 허수아비가 입고 있는 옷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이다. 그걸 벗겨 차에 실어 궁으로 온 다이애나, 숨 막히는 시간의 연속이다. 

  식사하기 전, 몸무게를 재야 하고, 아침점심저녁 모든 외출 시 입어야 할 옷을 매 아침마다 의상담당이 운반해 오고, 그렇게 정해진 옷만을 입어야 한다. 파파라치들이 열린 커튼 밖으로 사진을 찍어댄다고 찰스가 주의를 주자 커튼을 실로 꿰매어 버린다. 찰스의 상간녀를 멀리서 쳐다보며 그녀의 목에도 찰스가 선물해 준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한다.      

  참을 수 없는 전통 속에 정신을 잃고 헤맬 정도로 피폐해지는 다이애나의 정신상태, 그녀는 읽고 있는 책, 앤  불린, 헨리 8세에 의해 간통, 이단, 모반의 누명이 씌워져 처형당하는 인물에 자신이 이입된다. 그러면서 착란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전통과 자유 사이에 갈피를 못 잡는 다이애나.      

  두 아들이 참가한 꿩잡이 사냥터에 다이애너가 침입하여 사냥을 멈추게 하고 남편과 여왕, 많은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을 구출하듯 데리고 도망쳐 나온다.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 아이들과 함께 탈출의 자유를 만끽하는 다이애나를 향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All I need is a miracle, All I need is you...     

  이 노래는 그냥, 비틀스가 부른 노래가사다. 다이애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관심, 이런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실현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 될 만큼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것들, 그것이 다이애나의 니즈라는 것, 이런 걸 거라는 주제의식이 담긴 노래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그 하나하나의 요소가 건강하게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야 갈 때 우리 삶도 건강하게 잘 유지되는 것이다. 찰스가 선물한 진부 목걸이를 목에 찬 다이애나의 목 뒤로 진주 한 알이 깨져 나간 것은, 그녀의 삶이 그 어느 하나 때문에 삶 전체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우자 찰스이자, 그의 정부 카밀라 로즈메리 파커보울스다. 

  이제 다이애나는 스펜서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유 또한 돌아갈 수 없는 옛날에 대한 그리움이며, 자기 정체성의 확인에 해당한다. 일상을 꿈꾸는 왕비, 어쩌면 결혼 자체가 비극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저 철없는 어린 여자의 스트레스와 억압받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다이애나의 진짜 스트레스가 뭐였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고(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이나 상식적인 지식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면 누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겠나?), 배우의 외모와  연기가 가볍게 느껴지면서 더 그 무게감(다이애나라는 주제)을 잃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이애나의 착란과 스트레스의  이유로 등장하는 것이 고작 전통, 그리고 남편의 상간녀,  이 두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1%가 지배하는 집단, 그들 사회를 귀족집단이라고 부른다면, 권력을 가진 그 집단에서 적응 못 하고 버림받는 한 사람, 그녀는 나머지 99% 쪽으로 편입된다. 그녀를 people's princess로 부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권력이 힘을 상징한다면, 과연 누구의 힘이 더 큰 것인가에 대한 답은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 역사는 늘 정의의 편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 편이었던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비록 그 많은 사람들이 정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예술의 서 있어야 할 스탠스다. 진실과 정의의 편을 향해 한걸음 더 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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