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의 뿌리
아빠를 왜 사랑하게 되었냐는 딸의 물음에 엄마는,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었겠느냐고 대답을 한다. 여자들이 하는 흔한 말이다. 딸은 말한다. 당신의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이유도 없는 그 사랑 때문에 내 인생이 괴롭고 힘들다고.
딸이 아빠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주변인(우리)들의 상식에 대해, 정작 딸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아빠가 나에게 정상적인 섹스가 아니고 애널섹스를 한 것은, 나를 딸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빠의 집안에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아빠의 가족들에게 나를 딸이 아니라 연인으로 보여주기 위해 섹스를 했고, 차마 정상적인 섹스를 할 수 없었으므로 애널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근간이 개인주의에 있다고 본다면, 나를 제외한 그를 인정한다는-나와 그가 같다는 우리라는 개념보다, 나와 그가 다르다는 이질성을 먼저 받아들인다는-사고가 남녀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딸인 것은 인정하지만, 친자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이건 재벌가, 혹은 부자들의 사회 상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너와 내가 다르기 때문에 둘의 공통문제에 대해 일방(여성)이 희생하고 슬퍼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둘 사이에 남자가 끼어든다. 그 남자는 딸의 애인이 된다.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은 없다.
제목에서 밝히고 있는 '불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 이유는 관계성 때문이다. 엄마와 딸의 공통분모가 여자라는 점에서, 아버지라는 남성이 보여준 행태, 또한 둘을 놓고 보여준 남자친구의 선택. 이런 모든 관계를 앞세워서 정리된 사랑의 세계에 살고 있었던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사랑에 관대한 것은 남자보다 여자인 것 같다. 여성끼리의 사랑에서부터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에 관대해지기 시작했고, 더 너머에 있는 금기까지 깨려고 하는 여성의 무한확장되는 사랑개념. 그들이 파괴하고 있는 관계의 중심에는 남자가 있고, 여성이라는 자아가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