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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2. 2024

7년만에 돌아온 아내

브런치 시스템을 잘 몰라, 스토리에 2회 연재를 이미 해 놓았습니다. 그쪽에 있는 연재를 이쪽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앞으로 매주 일요일 12시를 기해서 한 회씩 올리려고 합니다. 혹시 독자들의 댓글이 빗발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독자들의 호기심을 빨리 해소시켜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 남겨 놓겠습니다. 천성이 게으르지만, 약속은 반드시 생명처럼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응원 댓글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총총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는 계단을 밟아 오르듯, 스텝 바이 스텝으로 한 계단 씩 나에게서 멀어져 갔던 것 같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어, 하루 아침에 모든 관계가 청산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래시계 유리병 속의 모래알갱이처럼 조금씩 소리없이 0.1그램의 무게로 흘러내리면서 어느날 이쪽에서 저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땐 돌이킬 수 없는 시간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태풍의 중심은 늘 평온하다고 하지. 하지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거느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원래부터 중심은 없었어, 모든 소용돌이의 집합체가 중심을 만들어 낼 뿐이거든. 그러다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의 열팽창 에너지원이 줄어들고 육지의 저항원들을 만나면 태풍은 급격히 소멸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 기간은 짧으면 일주일, 길어봤자 한 달이야. 그게 그렇더라, 겨우 일주일, 길어야 한 달 그 안에 인생을 걸진 말았으면 해.

 흐느끼는 내 어깨를 안아주며 혜연이 내 등에 얼굴을 묻고 한 말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입술과 숨소리, 입김이 내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7년 만에 돌아온 아내


"그때였을거야. 호프집을 나서면서 단념했어."


 아내. 정혜가 술회하는 과거의 어느 지점은 놀랍게도 내 기억에 없었다. 서로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은 관계가 주는 비극이다. 교감할 수 없는 사건을 둘 사이에 놓고, 서로 다른 극성을 띤 채로 주변을 맴돌지만, 이미 서로의 자기장 밖으로 벗어난 상대는 더 이상 서로를 끌어당길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크게 한번 나를 접어버린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미국으로 날아갔다. 미국자격시험에 대비해 먼저 어학코스 입학허가서를 받아놓았지만, 면접관은 단호했다. 한미 동맹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공부하러 간다면서 아이들은 왜 데려가냐더라."


 입국심사 인터뷰에서 떨어진 아내는 속상한 마음을 내려놓는가 싶더니, 날개옷을 얻어낸 선녀가 되어 아이들 둘을 데리고, 하늘 같은 나라, 천조국으로 달랑 여행비자를 들고 무턱대고 날아가 버렸다. 인터뷰 탈락 6개월 만에 벌어진 급행이었다. 이제 드디어 혼자가 된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모든 구속으로부터 풀려날 자유와 해방이었다. 아내 역시 동시에 자유와 해방을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누라가 죽으면, 절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더라. 니가 지금 딱 그 꼴이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국에 출장 가 있던 태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난에서 시작해서 장난으로 끝난 대화였다.


 "여기 법인이 필요한데, 이번에 현지한국인 몇 명 미팅하고 채용하면 바로 서류작성해서 설립인가 받아야 되거든. 좀 급하게 처리하고 있어. 니 마누라가 어디로 간다고? 오렌지 카운티 옆에, 응, 알았어, 지금 눈 좀 붙였다가 제수씨 마중 나가봐도 되지? 이 넓은 땅에 오는데 반겨줄 사람이 많아야 안심이 되는 거야. 혹시 아냐? 제수씨가 우리 회사 다니게 될지..."  


 아이들을 태우고. 떠나가는 비행기 꽁무니를 바라보며 길고 질기게 매달렸던 고무줄이 하나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시간부로 혼자라는 사실에 황홀해 했고, 콧노래에 휘파람까지 섞였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냥 좋았고, 홀가분했다. 마음 한켠엔 벌써 허전함에서 오는 외로움이 바닥에 깔리는 정도의 즐겁고 불안정 상태가 살짝 흥분되기도 했다.

 공항 주차장에서 차를 빼 돌아 나오면서 아내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어디 깊은 산속에라도 가서 환호를 해야 할 것 같은 쾌감을 느끼며 운전대를 어루만지는 손아귀가 벌써 달달해져 왔다.

 그동안, 나에게 아내란 어떤 존재였을까. 아이들은 의무적 혈연관계에 있으므로 돌보아야 할 인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내는 다르다. 이렇게 영원히 거리를 둔 채로 내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이기적으로 밀려왔다.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라지 않을 테니, 너도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남남은 될 수 없다. 오히려 남들보다 깊은 애정과 배려는 우선 담보되어 있겠지. 우린 그런 관계여야 한다. 책임과 배려, 그리고 의무가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이다. 나는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가족에게, 최선을 다 했고, 내 삶을 희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의 해방은, 잠시 동안 누리는 보상 정도의 감정과 생활일 것이다. 그래서 아내의 미국행은 일정 기간동안에 치뤄야 할 행사와 같은 것이며, 덕분에 서로 일상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단기간의 휴가 같은 거라 생각했다.    


 시간은 쏜 살처럼 날아가, 그렇게 7년이 흘렀다. 7년이 흐르는 사이, 나는 여전히 혼자 식당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혼자 사는 남자, 기러기아빠가 되어 있었다. 매년 연가를 내고 미국행 비행기를 11시간, 13시간을 탔고, 그럴 때마다 다시 오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하며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그 사이 아내는 미국에서 자격증코스를 딸 수 있는 대학이 아니라 직장을 얻었고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왜 당신은 날 오라고 하지 않아?"


 아내의 미국체류 사유가 만료되면서 기간연장이 필요했다.연장에 연장을 계속하면서 아이들은 공립학교를 졸업했고, 둘째 아이까지 다른 주의 대학으로 진학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들이 체류 명분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운타운의 복지센터나 한의원의 보조인력으로 일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내만 귀국하면 미국생활이 모두 청산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아이들 생활비야 내가 송금해 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돈을 벌고 있었고, 대학으로부터 저소득층 장학금을 받고 있는 상태라 큰 부담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 쪽에서 아내는 철저한 대비를 할만큼 완벽한 성격의 아내였다.


'글쎄, 나도 그게 의문이야... 왜 그럴까? 니가 필요하면 내가 가만히 있었겠어?'


 대꾸를 못하는 이유였다. 외롭긴 했지만, 외로운 것이 자유와 해방을 이기지는 못했다. 나는 나름 혼자서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7년 동안, 기껏해야 미국거주 초기 삼 개월 정도 매일 통화하고 화상을 통해 얼굴을 보며 눈시울을 적셨던 우리는, 이제 한 달에 한 번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은 채 메신저에 접속되어 있는 모니터 위에 떠 있는 접속자 이름만을 확인하며 지냈다. 퇴근 후 저녁을 먹을 때쯤이면 아내는 자야 할 시간이 됐고, 내가 아침에 출근할 시간이 되면 아내는 퇴근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엇갈린 시간만큼이나 긴 7년이 흘러갔다. 변함없이 해가 뜨고, 달도 떴지만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않으면 하늘에 무엇이 떠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무덤덤하게 고착되어 갔다.

 그동안 아내가 한국에 온 일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관광비자로 체류하고 있었고, 돈을 들여 투자비자로 변경 후 거주허용되는 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귀국했다가 다시 비자를 받아 나가든가, 아니면 현지에서 돈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그것도 돈을 써서 오지 않는 쪽으로 처리했기에 더더욱 한국에 올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비용적으로 더 싸게 먹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는 7년간 딱 두 번, 한국에 왔다. 전세 준 집의 집세를 올려 그 돈을 가지러 왔을 때와, 이유를 알 수 없는 방문, 그렇게 두 번이었다. 첫 번째 방문은 계약서를 다시 쓰고 집세를 올려 받고 그 돈을 가지고 곧장 다시 돌아갔고, 그게 다였다. 내가 혼자 기거하는 집에 돌아온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지내다가, 이런저런 친구들을 만나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갔다. 기억에 남는 일은 그게 다였다.


 그로부터 3년 후 아내가 다시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착한다는 날이 지나도 집에 오지 않았다. 기다렸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다. 이러다 그냥 돌아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 달 전에 내가 미국을 다녀왔던 것도 있었겠지만, 아이들을 다 데리고 온 아내는 아마도 수원에 살고 있는 작은 언니네 집에 가 있으리라 짐작만 될 뿐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도통 소식이 없었다. 공항을 나와 우리 집을 스쳐지나고 수원으로 넘어간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새벽에 도착해서 자는 내가 방해를 받는다고 해도, 공항에 나와 이들을 태우고 간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 4년 차에 한번 오고, 7년 차에 한번 오면서 내가 아니라 언니가 마중을 나가서 언니네 집이 있는 수원으로 바로 갔다는 생각에 미치긴 했지만, 이해할 수없었다. 우린 가족이 아니던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는 존재가 가족 말고 누가 더 있을까, 하긴 언니도 가족이지, 나보다 더 원초적인 피를 나눈 혈족이었다는 걸 내가 깜박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자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고, 그래도 아내의 처신에 대해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은 업어지지 않았다.

 퇴근해서 밥을 차리고 있었다. 기러기 생활 7년이면 김치도 담글 줄 알게 된 터라, 밥상쯤은 눈감고 운전하기 쯤이 되어버렸다. 벨이 울렸고, 누구세요? 하며 반시적으로 열어젖힌 열린 문 틈 밖에 아내가 혼자 서 있었다.  어깨끈이 늘어진 누런 런닝을 걸치고 트렁크 팬티가 허리춤에 걸려 다리 위로 흘러내린 차림으로 오른손엔 찌개를 맛보던 숟가락을 뒤로 잡은 채 아내 앞에 섰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얼어붙듯 정지했다.  

 아내가 한국에 온 지 4일째 되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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