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빠르게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다. 이런 거창한 문구가 아니더라도 한국인들에게는 그 만의 근면과 성실 DNA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세상 누구든 열심히 살지 않겠나 만, 한국인들이 유난히 부지런한 것은 사실이다. 혹자는 나라 잃어본 경험, 아직 분단되어 휴전 중인 환경에서 그 독특한 DNA의 실마리를 찾아도 보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게으름의 기준이 높아 조금만 여유롭다 싶으면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
나는 지금 영국땅, 사고방식이나 교육체계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가끔 한인 교민들을 만날 때면 "그래 그랬지"할 때가 있다. 아이들 교육에 진심으로 시간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어려움은 밝은 미래를 위해 얼마든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영국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그래야 하는데?" 지금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아주 말간 눈빛으로 되물을 때가 많다. 이곳 사람들은 다수가 덜 일하고 '여유' 있게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주제, 게으름
<굿바이, 게으름>의 저자 문요한은 정신과 의사로 '정신적 치유'는 물론 '정신의 성장'이라는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기 계발'과 '상담'의 통합에 힘쓰고 있다. 2005년부터 정신경영연구회라는 정신 훈련 전문가 모임을 결성해 치유와 성장을 위한 '통합정신훈련'을 시행하고, 현재는 상담 전문 클리닉 <더 나은 삶 정신과>와 성장 리더십 및 전신 훈련 전문교육기관인 <정신경영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약력에서도 비치듯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게으름을 '치유가 아닌 정신의 성장'에 주목해서 설명하고 있다.
게으름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으로 정의한다.
"살다 보면 매 순간 선택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삶은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 엄밀하게 말해 삶에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능동)'과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수동)'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굿바이, 게으름> 저서 발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게으름도 선택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게으름은 선택이 아닌 회피이다. 만일 게으름을 능동적으로 선택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게으름이 아니라 여유라고 불러야 한다. 게으름은 마지못해 선택했거나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게으름은 과연 악인가?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나 격언들은 참 많다. 대부분 게으름을 나무라고 노동과 땀을 예찬하는 내용이다.
"누가 지어 냈을까?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일을 시키는 사람이었을까?
아무래도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굿바이, 게으름> 저서 발췌
“오만, 정욕, 분노, 시기, 나태, 탐욕, 탐식” 7가지 죄악으로 서양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로 여겨졌고, 이는 소수만이 게으름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영국 역사를 둘러보면 왕들의 전설은 모두 7가지 항목의 종합 선물세트와도 같다. 그들의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으려면 없는 자들은 금욕하며 성실하게, 게을러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칼뱅주의가 퍼지며 노동을 신성시하고 직업윤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소명의식, 이윤창출, 검약 등으로 대표되는데,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천국으로 간다고 말했다. 반대로 게으르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균일하게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의 발명과 함께 우리는 시간에 맞춰 근면하게 일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한 노동의 굴레에 빠져 있다. 시간이 돈이 되는 세상. 게으름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가난을 부르는 것이라는, 부자가 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는 공식 속에 현대인들은 시간 자체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는 게으를 권리가 있다.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굿바이, 게으름> 저서 발췌
게으름 애찬자들은 게으름을 악덕이나 죄악이 아니라 지혜이자 미덕으로 격상시켰다. '삶의 여유'와 '인간성 회복'으로 게으름을 재조명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게으름은 '느림'과 '여유'이지 선택을 피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전적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유로운 게으름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한다. 삶의 방향성과 지향점에 방점을 둔다
게으른 사람 vs. 실천적인 사람
게으른 사람은 우선 상황의 부정적 요인을 중심으로 자각한다. 동기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대부분 선택을 미루거나 회피하고(정신적 게으름) 시작을 미루거나 회피하다가 막판에 서두른다(행위적 게으름). 그 결과에 대해 자기 합리화하거나 자기 비난을 시도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실천적인 사람은 자각의 단계에서 우선 긍정적인 요소에 집중한다. 동기가 분명하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을 분석하고 계획을 세운다. 큰 그림이 아니라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을 작게 나누어 실천에 목표를 둔다. 몰입의 성과나 한계를 마주할 때에도 긍정적인 부분에 집중해서 다시 재시도한다.
세상 일에는 모두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삶의 방향과 지향성이 행동의 차이를 낳고, 능동적인 사고가 녹록지 않은 성과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도하는 과정을 감내하게 한다.
게으름의 극복을 위한 십계명
'하면 된다!'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가!'를 발견하라.
마음의 상태를 살피는 또 하나의 마음을 키워라.
자신 안에 '더 큰 존재'가 있음을 믿어라.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하라.
자신의 강점과 재능에 기초하여 '큰 그림(비전)'을 그려라.
운동과 휴식은 천연의 보약임을 명심하라.
매일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자기의식을 행하라.
중요한 일을 우선적으로 하라.
계획과 일을 소화 능력에 맞게 나눠라.
매일 한 가지씩 능동적 선택을 하라.
<굿바이, 게으름> 저서 발췌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환경 설정이 필요다.
무엇보다 건강이다. 하루 과식이나 과음이 얼마나 일상을 흔들 수 있는지 경험한 날이면, 자신이 얼마나 유기적이고 미약한 존재인가 놀랍다. 정신과 신체를 맑고 건강하게 유지는 것은 끊임없는 수련과 습관의 힘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때 일정한 루틴이 힘을 발휘한다. 하루의 시작이나 마감에 나만을 위한 생활습관을 가지면 일상의 만족감에 도움이 된다. 하고자 하는 일을 잘게 나눠 반복적인 성취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왜 해야 하는가' 행동의 대 전제를 분명히 한다.
'게으름이야, 여유야.' 하루에도 열두 번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대 전제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 인생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여유로운 게으름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