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들이 학교 행사에 가고 나니 오래간만에 부부 둘만의 시간이 생겼다. 각자 바쁘게 사느라 서로 시간내기 어렵던 차라 주어진 시간을 아주 귀하게 쓰고 싶다.
나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오랜만에 날씨가 맑고 화창하니 가까운 해변 언덕을 함께 걷기로 한다. 영국 남서부 차머스(Charmouth) 해변 근처 골든캡(Golden Cap) 절벽이 근처에서 가장 높다 하니 한 번쯤 가보고 싶던 참이었다.
태양이 높고 낮 시간이 가장 길다는 절기 하지(夏至)를 지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영국은 아직도 기온 20도 근처를 맴도는 서늘한 여름이다. 반면 덥지도 춥지도 않다 보니 산행하기에는 딱 좋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고, 이른시간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푸른 들판에 피어 있는 들꽃들은 바닷바람에 살랑이고, 저 멀리 파도 소리, 곳곳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뿐. 끝없이 이어지는 바위절벽은 웅장한 풍경을 자랑한다.
중년이 된 우리 부부는 도란도란 추억 이야기, 풍광 이야기도 하지만, 말없이 그냥 걷기도 한다. 이심전심 편안하고 좋다. 동행한 우리 집 강아지는 코커스파니엘 특유의 기다란 귀를 바람에 휘날리며 앞장서 신나게 달려간다.
사카모토의 백년 된 피아노 실험
얼마 전 온라인에서 다 스러져가는 피아노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본의 유명한 음악가인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 Ryuichi Sakamoto)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100년 전 만들어진 피아노를 뉴욕집 마당에 내어 놓고 어떻게 부서져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관찰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1년이 된 최근, 그 피아노는 완전히 부서지고 풍화되어 마침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고 한다.
사카모토 자신과 같은 운명을 피아노를 통해 직접 바라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생각이 궁금해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사카모토의 생애 마지막 출간작을 읽기 시작한다.
@위즈덤하우스
“몇 년의 시간 동안 수차례 비바람을 맞으며 도장도 다 벗겨진 지금은 점점 본래의 나무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떻게 썩어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나이 먹어 가야 하는가, 하는 것과도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 지음 / 황국영 옮김 - 밀리의 서재 e북 p.342/412
1983년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그는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의 사운드 트랙을 비롯해 많은 수작들을 남겼다.
열정적인 음악작업의 기록, 부모님 그리고 가족들과의 이야기, 세상에 남길 자신의 음악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 인생의 끝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번뇌가 책 속에 녹아 있다.
에피소드 중에는 젊은 시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의 인연, 서울에서의 공연 그리고 투병 중에 만난 한국의 BTS 슈가와의 일화도 나온다.
우리 부부는 한참 절벽을 따라 걷는다. 경사진 언덕을 자신 있게 오르기도 하고, 들풀이 가득한 평야에서는 콧노래 부르며 여유를 부리다가, 내리막길은 미끄러질까 조심히 걷기도 한다.
정상 즈음에는 유유히 풀 뜯고 있는 젖소 무리를 만나는데, 혹여나 공격을 해올까 조심조심 그 주변을 돌아 걷다가 소가 싸 놓은 똥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기도 한다. 산책길도 굽이굽이 인생길과 같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주위를 돌아본다. 기대한 바와 같이 주변 암벽 해안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바다와 어우러진 풍광이 장관이다. 골든캡(Golden Cap)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상상해 본다. 석양이 지는 모습이 금빛이어서가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사실은 노란빛의 모랫돌들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다시 걸어온 길을 돌아 나온다. 이제는 다리 근육이 땅기고 숨이 가쁘지만, 기분만은 상쾌하다. 요즘 나이테가 나기 시작하고 기운이 없어지는가 싶었는데, 이번에 보니 아직은 꾸준히 움직이면 근력에는 크게 문제없을 것 같아 내심 다행이다. 왕복해 보니 6마일, 이만 보가 조금 넘는 기록이지만, 가파른 언덕 경사길까지 감안하면 수치 이상의 제법 고된 길을 걸어왔다.
어떻게 나이들고 싶은가
영국 해변가에서 만나는 기증 벤치 @세반하별
목표 지점 끝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해안가가 내려다 보이는 좋은 위치에 서 있는 벤치가 보인다. 등이 맞닿는 부분에 '생전 이 언덕을 무척 사랑했던 고인을 기리며 기증된, 그가 세상에 남긴 흔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국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벤치 중 하나지만, 이번주 고 사카모토의 이야기와 음악에 푹 빠져 있었서였을까 고인의 인생과 마지막을 준비했을 기증자의 마음이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남편에게 잠깐 그 벤치에 앉아 가자 제안한다. 책을 읽다가 최근 알게 된 사카모토의 곡, '꽃은 꽃이 아니다(A flower is not a Flower) 음악을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