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는 암 선고받은 지 8개월 만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무엇이든 엄마한테 물어 확인받고 나서야 행동하던,아직은 아이였던 98년 대학생 시절이었다.
눈물로 장례를 치르고 이제는 어른이 되겠다 다짐했다. 낮에는 학생이고 저녁부터 밤까지는 입시학원 보조강사인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퇴근하는 길이 무척 피곤하고 기운이 없다. 그런 날이면 엄마가 해주시던 뽀얗고 진한 국물의 설렁탕이 생각난다. 제법 이름난 전문점에 들어가 특대 사이즈를 주문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이자, 한 숟가락 크게 국물을 떠 마신다.
순간 뿌옇게 시야를 가린다. 설렁탕에서 올라온 김이 서린 것인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뜨끈히 잘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그 뽀얗고 진했던 엄마표 설렁탕도 이제는 세상에 없구나. 그동안 정신없이 공부와 일로 몰아치면서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음을 그때서야 깨닫는다.
음식을 통해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고 또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읽는다. <H마트에서 울다(Crying in Hmart)>의 저자 미셀 자우너다.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서울생으로 생후 9개월쯤 미국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간다. 한글학교에도 가고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방문, 친척들과 시간을 보내며 한국적 정서를 경험한다.
반면 학교에서는 유일한 한국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다. 엄마는 강박적으로 집을 깨끗이 관리하고 저녁이면 피부 관리, 패션 등으로 자신을 가꾼다. 사춘기가 되면서 미국 엄마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엄마와 부딪힌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엄마여서 그 말과 시선에 더 깊숙이 상처받는다.
딸은 의식적으로 집에서 먼 대학교로 진학한다. 대도시로 나가 자유로운 뮤지션으로 삶을 살고 싶다. 엄마로부터의 독립, 반항하듯 말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뜸해진다. 음악 하는 히피 친구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지만 엄마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인생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별의 순간이 다가와서야 깨닫는 것이 인간이다. 어느 날 미셀은 엄마의 췌장암 소식을 듣는다. 서둘러 투병 생활을 도우려 고향집으로 향한다. 항암 치료하는 엄마를 위해 좋아할 만한 음식을 기억해 내고 만든다.
예전 짬뽕과 바삭한 전을 좋아하고 음식 만들어 나누는 것을 즐기던 엄마를 떠올려 보지만, 지금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토해내는 현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직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계속 되뇌면서 말이다.
딸의 사진, 오래전에 그린 그림, 학교에서 받은 상장들을 하나 빠짐없이 모아둔 것을 보면서 엄마에게 자신이 어떤 의미였는지 느끼고 눈물을 쏟는다.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고 보살필 준비가 되어 있던 엄마였다.
미셀은 엄마를 한 여자의 인생으로도 바라본다. 자신에게 상처가 되었던 엄마의 말들은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라면서 베인 가치관과 습관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낯선 미국 땅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 바람이 나기도 하고, 약을 달라고 하면 컵 없이 덜렁 약병만 가져오는 모습은 배려나 자상함이 부족한 모습을 그린다. 그렇다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서툴게 옆을 지키는 엄마의 남편이자 자신의 아빠를 바라보면서 여자로서 느꼈을 불안함과 외로움도 이해한다.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는 항암 과정을 겪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별을 준비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두 번의 항암 치료가 실패하자 미셀의 엄마는 고국과 한국 가족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한다. 바람대로 가족들은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장거리 비행이 역시 무리였던 걸까. 급성패혈증이 진행되면서 꿈꾸던 여행은 물거품이 되고,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된다.
엄마 임종 전에 서둘러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만난 이별의 순간. 엄마의 장례식 후 한국에서 온 가족들에게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미셀은 그렇게 엄마의 딸로서 변해 버린 세상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H마트에 가서는 자주 먹던 김 브랜드가 뭐였는지 몰라 습관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한다. 순간 이제는 물을 엄마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는 결코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픔 또한 인생으로 끌어안는 과정일 뿐이다.
"엄마가 사라지고 나니 이런 것들을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일은 엄마와 함께 죽어버렸으니까. 한낱 기록과 내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오롯이 내 숙제가 되었다. 이 얼마나 돌고 도는 인생인지, 또 얼마나 달콤 쌉싸름한 일인지.
<H마트에서 울다> p.173 이북
나는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스스로 엄마가 되고 나서야 돌아가신 엄마를 제대로 추모하고 기억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아이 기저귀 갈면서 동생 똥냄새도 구수하다고 웃으시던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 뚝, 아이들 운동회에서 학부모 달리기 하고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기억 속 엄마 모습과 내가 꼭 닮아서 눈물 뚝. 점심도시락을 쌀 때면 매일 도시락과 같이 넣어주시던 엄마 쪽지가 생각나서 눈물 뚝뚝.
저서 <H마트에서 울었다>에서 작가 미셀 바우너는 엄마가 해주시던 한국 음식을 통해 절절한 사모(思母)의 마음을 담는다. 이 책을 통해 당신 삶의 구석구석에서 엄마 생각나면 울어도 괜찮다고, 엄마는 기억 속 과거형 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따뜻한 공감이고 위로라고 얘기해 주는 듯하다.
아파서 밖으로 표현하기를 꺼리던 내가 글로 엄마에 대한 감정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준 책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한동안 뜸하던 엄마 생각에 푹 빠져본다. 작가 미셀의 말처럼 엄마가 남긴 표식을 단서로 나 자신을 그리고 인생을 이해하는 오롯한 순간을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