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으면 가끔 실없는 농담을 하고픈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나에게 “Where are you from?” 묻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교육 수준이 낮거나 그냥 마음대로 사는 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민 초기에는 “I'm from Korea.” 대답해 줬습니다. 그러면 언제나 그렇듯 “ Which one the North or the South?”합니다. 농담 삼아하는 말에 정색하기도 애매해서 “the South”라고 대답하거나 “Does it matter for you?”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했습니다.
한 번은 길 지나가던 사람이 나에게 “니하오”라며 인사합니다. 이 또한 아시아계 영국인들에게는 차별성 발언으로 문제 될 수 있는 언사입니다. '나 중국사람 아니거든?'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상대해서 뭐 하나 싶어 애매한 미소를 짓고 지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던 길 갔으면 생각도 흘려야 하는데 두고두고 기분이 찜찜합니다.
영국은 철저히 개인 정보에 관한 질문을 삼가고 인종, 성별, 출신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법적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함부로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질문하게 되더라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문제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개념이 없는 분들인데, 어디 가나 이런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다른 어느 날, 예전 슈퍼마켓과 같은 상황이 발생합니다. 한 노신사 분이셨는데 앞뒤 없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묻길래 “ I'm local. Does it matter for you?(나 동네사람이야. 뭐 문제 있어?)” 제법 큰소리로 받아쳤습니다. 마침 직원이 옆을 지나가다가 조용히 그 남자분에게 주의를 줍니다.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길, 그 노신사가 따라 나와 사과를 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요. 정중한 사과라서 잘 받아줬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농담처럼 그런 질문을 다른 분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에 또 “니하오” 인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봉쥬르” 아니면 “차오” 해주리라 마음먹고 있는데, 아직 기회가 없었네요.
한국에서 해외연수차 순환근무로 영국에 와 있던 이웃이 있었습니다. 딸 둘과 동행했었는데, 하루는 놀이터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그 집 두 딸이 정글짐에서 같이 놀고 있었는데 한 로컬엄마가 "쟤들(한국애들)한테 타도 되는지 묻고 타지 않아도 돼" 언급이 발단이었지요.
모두가 서로 차례를 지켜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몇 번 새치기가 반복되자 큰 아이가 하지 말라 제지하니 로컬 할머니가 나서서 "외국 애들 왜 이리 많아?" 하면서 언성을 높였나 봅니다. 지금 "인종차별하냐?" 대꾸하니 주변 로컬 엄마들은 슬금슬금 짐 싸면서 물러나는데 아마 이 할머니가 "그래 그렇다 왜?" 그랬나 봐요. 그 이웃분이 아이들이 위험해질까 봐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생각할수록 분이 풀리지 않았던 게지요. 동료한테 그때 일을 토로하니 회사 게시판에 이 이야기가 올라갔고 대부분의 로컬 동료들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서 리포트를 남겨야 한다고 강력 추천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이미 다음 달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그냥 넘어가도 그만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경찰에 리포트 올라가고 CCTV확인하고 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증거불충분 결론이 났지만, 경찰서 직원들이 코비드 이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인종 관련 사건사고에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다음에 이런 같은 일에도 꼭 리포트 해달라고 전했다나 봅니다.
영국 학교에서 제가 근무하면서 느낀 바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말 끝마다 “love”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수더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업무 시간이나 대우에 대한 어떤 불편함이 있으면 단호하게 소리 내어 거부의사를 밝힙니다. 가끔은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지요. 같이 일하는 동료인데 하는 그런 배려는 둘째 문제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보통 남들과 스몰토크를 하기 좋아합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날씨 얘기, 교통 얘기 등 그저 일반적인 얘기들을 길 가던 사람들과도 한참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웃에 친절하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나의 구역이나 차례에 대해서는 규율에 따른 만큼 철저히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고자 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해보면 압니다. 남이 서행하는 것은 참아줄 수 있지만, 새치기나 교통 규범을 어기면 클락숀을 눌러가며 험한 욕을 하기 십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상황이 규칙 안에 있다면 용납되고 기다릴 수 있지만, 규율에서 벗어나면 참아주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불편하거나 기본 규율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지체 없이 이의를 제기해야 자신의 권리를 잘 지킬 수 있습니다. 동양인, 특히 여성 하면 수동적이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아시아 여성상이 반영된 바도 있겠지만, 언어적으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부조리할 때 어필을 잘하지 못해서도 한 가지 이유인 것 같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규칙을 따라야 하듯, 나라마다 그 나라의 문화가 있습니다. '사회 안에서의 나'를 생각하는 아시아 문화권에서 '개인의 자유권리 보전을 위한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코비드 락다운을 할 때의 나라마다의 대응 방향이 달랐던 것이 아주 비견한 예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더니 맞지 않은 일은 아니라고 바로 바로 대응하고 해결하는 나를 발견한 어느 날, 그동안 적응 많이 했구나 느낀 날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