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책장에서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단편 소설책을 발견했다. '무슨 책 제목이 이래?'
자신의 생식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던 주인공 새 신랑. 어느 날 아내의 임신 소식에 혹시라도 건강결과가 오진이 아니었는지 확인하러 다시 의사를 찾았던 그는 몇 년 후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 담당 의사에게 말한다. 아이 발가락이 자신을 꼭 닮았다라고 말이다. 단편 소설이라 한숨에 읽어내고는 이 마지막 대사에서 뭔지 모를 먹먹함과 함께 무슨 의미일까 꽤 고민했던 기억이다. 방에 드러누워있다가 밑도 끝도 없이 엄마한테 달려가 발을 보여달라 했다. “엄마랑 나랑 발이 닮았나?” 아무리 봐도 사람 발 다 같은 것 같은데 하며 물었더니 “둘째 발가락이 더 긴 것이 꼭 닮지 않았니”하며 내 눈을 맞춰가며 말씀하시던 엄마 얼굴이 기억난다. 추호의 의심이 없는 일도 다시 확인하면서 안심한다. 내 모든 세상인 엄마와의 든든한 유대를 발가락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다시 확인한다.
첫 딸이 태어나고 6개월 무렵 영국 사시는 시 부모님이 서울 우리 집에 오셨다. 태어난 손녀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셨는데, 여행을 마치고 내외분들이 돌아가신 후 남편이 무슨 말 끝에 시어머니가 하셨던 얘기를 말한다. “아이가 며느리를 꼭 닮았구나. 너랑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어.” 이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 한참 생각했었다. 서양 할머니가 까만 머리카락에 몽실몽실한 신생아에게서 자신의 아들 닮은 모습을 찾아 동질감을 느끼고 싶으셨었나보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 말씀드리지만 시 어머님에게는 총 7명의 손자 손녀가 있는데, 그 사랑 표현은 누구 하나 모자람이 없다. 지난 크리스마스 날 클수록 아빠를 쏙 빼닮아가는 딸을 보시더니 “얘야, 넌 커갈수록 네 아빠를 똑 닮아 가는구나.” 하며 웃으신다. 역시 내 핏줄이야 동질감인 걸까.
닮았다는 표현은 어떨 때 쓰는가.
먼저 정말 무언가와 시각적으로 성질적으로 닮았을 때 쓴다. 인간관계에서는 “어머 누구 닮았네~ 무엇을 닮았네” 하는 표현을 주로 화자가 상대와의 친밀감을 표현하고자 할 때 쓰인다. 상대와 자신을 하나로 묶는, 나와 너의 관계를 잇기에 '닮았다'는 좋은 소재다. 닮았다는 우리는 같은 부류다라는 동질감으로, 무리에 소속되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기본적인 인간 욕구가 이런 본능을 자극한다.
인간관계에서 “너와 나는 결이 다르다”라는 말을 한다. 너와 내가 공통점이 없고 닮지 않았다는 나름 정제된 표현이다. 방어 기제 일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인간의 욕구 중에는 소속감에서 오는 안정감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 다른 것에 대한 갈망도 있다. 다름이 특별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미처 알지 못한 다른 관점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 안에서 다른 세상,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성 간의 애정도 나의 비슷한 구석보다는 다름에 끌리는 경우가 많다. 휴가로 해외여행을 떠나 전혀 다른 생활양식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것, 특별한 날 좀 색다른 레스토랑에 가는 것도 일상의 다름을 즐기는 인간 본능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으로 이민을 온 후 닮은 구석이 1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기후, 문화 등으로 적응이 어려웠다. 유럽 중에서도 자신의 문화에 콧대 높은 영국은 이방인에게 닮은 구석을 애써 보여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 문화에 들어오라고 도도하게 굴었다. 나와 닮은 것들이 없는 것 같아 고국이 무척 그리운 시기도 있었다. 코비드 락다운 기간은 그 경험을 더욱 극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던 때, 닮은 구석을 찾는 노력보다는 혼자 뭔가를 하는 것이 편해지던 참이었다. 내 경우는 코비드라는 외적 상황뿐만 아니라 불혹에 접어들면서 체력적 한계에 따라 집중할 수 있는 일이나 관계만을 의도적으로 한정하는 인생 사이클과도 맞물린 이유가 있다.
작년 나는 그리고 그리던 고국 방문 기회가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이 손 닿는 곳에 널려 있고 나랑 똑 닮은 사람들이 서울 안에 가득하다. 아직 초 봄인지라 좀 쌀쌀했기에 내 여동생의 겨울 외투를 빌려 입고 밖에 나갔다. 동생 옷은 그 겨울 최고 히트 상품인 경량 아우터였고, 지하철역에 들어서 보니 나와 닮은 모습뿐만 아니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순간, 의외로 나와 닮았다는 안정감보다는 이질감이 컸다. 나도 모르게 그동안 영국에서 닮은 구석들을 찾아내며 다름에 익숙해졌구나 그때 깨달았다. 몰랐다. 그전까지는 말이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 나와 닮았다는 익숙함 못지않게 나와 다르다는 이질감의 장점을 노트에 적어본다. 꼭 이민이 아니더라도 살면 살수록 나와 다른 존재들 사이에 닮은 구석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많아진다. 나와 다름도 얼마든지 공존하며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다름은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의 시각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 다름과 나의 접점을 찾는 과정 속에서 나만의 Only One을 발견하기도 한다. 닮음과 다름, 세상의 조화를 즐긴다. 이것이 곧 나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