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쯤에는 가능할까요 쉘 위 댄스?
대화가 단조로워지는 중년 부부, 함께 할 취미 생활이 필요해지나 봅니다.
스물여섯, 이제 회사 생활에 차츰 적응이 되어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하던 때. 친구가 전통 볼륨댄스 동호회가 있다는데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본다. 일하는 회사에서 멀지 않은 역삼역 어느 건물 지하 1층. 내 친구는 키가 170이 넘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미술 공부를 하는 예술적인 친구. 나는 그에 비해 땅딸하니 오동통한 몸매. 딱 둘이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의 눈빛에서 이미 잘할만한 애와 별로 기대되지 않는 애로 나눠진 듯한 느낌은 내 착각이려나 모르겠다. 첫날이니 학원에서 댄스 슈즈를 빌려서는 처음 온 이 몇 명은 따로 모여 기본 동작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연령대도 다양했는데, 이때 한창 일본 영화 “쉘 위 댄스?”가 유행한 후라 그런 니즈가 더 많았었는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걸음마 배우는 기분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발 다리 모양을 따라 하는데 이것이 보기보다 쉽지 않다. 기본 동작들인 데 따라 하기를 30여 분, 촉촉이 땀이 밴다. 다음 동작은 허리로 누운 8 자 그리기. 골반을 돌려가며 말 그대로 누운 8 자 모양을 그리는 것인데, 옆 친구에게서 “끙” 소리가 들린다. 알고 보니 이 늘씬한 친구에게 춤추는데 중요한 한 가지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유연성이었다. 골반이 돌아가지 않고 말 그대로 나무토막 같은 움직임이었다. 본인도 웃기는지 피식 웃는다. 반면 나는 의외로 유연성이 있었다. 스텝이나 유연성이 제법 괜찮았는지 오늘 새로 온 친구 중에 나를 콕 찍어 단체 댄스에 슬쩍 끼워 넣으신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 무리에 끼면 이런 기분이려나. 덕분에 길이 늘씬한 친구는 “재미없다 다음부터 안 가겠다”라고 선언. 친구 없이 무슨 재미인가 싶어 나 또한 그날 하루의 경험이 끝이긴 했지만, “나도 추면 출 수도 있겠다”자신감이 생긴 경험이 되었다.
말레이시아 내가 살던 콘도는 2-3년 해외 발령으로 나와 있는 젊은 부부이거나 은퇴 이민 오신 부부들이 주로 생활하는 커뮤니티였다. 유럽 출신 사람들이 많았고, 다들 각자의 이유로 삶에서 경험 거리, 즐길 거리들은 찾는 사람들이었다. 구시가지는 식민지 때 지어진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하고 관공서들이나 금융권 회사들이 주로 입주해 있었다. 그 건물들 끝자락 해변 즈음에 이름도 앤틱스러운 Eastern&Oriental Hotel이 있었다. 하얀 서양식 건물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빨간색 카펫이 깔려 있고, 내부 인테리어부터 하다못해 레스토랑 서빙하는 음식 식기들까지도 다들 연식이 있는 그런 클래식함을 자랑스러워하는 호텔이었다. 유럽 커뮤니티는 그들의 연례행사들을 주로 이 호텔에서 개최했는데, 매년 5월이면 영국계 커뮤니티가 주최하는 Mayball행사가 있었다. 평소에 어린아이들 키우는 엄마들로 애들 물건 들고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여인들이 그날만큼은 곱게 치장하고 파티에 참석한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과 남편들 대동하는 귀한 기회로 가족들이 모두 친해지기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그즈음 나는 몇몇 사람들과 크고 작은 펀드레이징 행사들을 조직하는 중이라, 다른 행사 주최 측들을 응원하면서 서로 돕는 네트워킹이 중요했다. 축구나 크리킷을 좋아하는 스포츠 팬이고 볼륨 댄스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을 잘 설득해 본다. 볼륨댄스만 하는 분위기가 아님을 설명하고 지루하면 잠깐 인사만 하고 바로 나오자 철떡 같이 약속을 하고 나서야 남편과 부부동반으로 파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행사장에 들어서면 야외 해변으로 안내된다. 하얀 유러피안 건물 앞은 풍성한 야자수들이 늘어서 있고 저녁 5시쯤이면 뜨거웠던 대낮의 열기가 가라앉으며 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나둘 아는 사람들이 모이면 “다들 너무 멋지다 이쁘다” 한바탕 칭찬 바람이 불고, 한 시간쯤 지나면 하나둘 실내 행사장으로 입장을 시작한다. 뷔페 형태의 둥근 탁자들이 하얀 식탁보를 걸친 채 쭈욱 늘어서 있고 각자 일행들과 앉아 수다를 떨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주최 측에서 준비한 러키드로우와 후원금 모금행사가 시작된다. 파티 현장이라 그런지 제법 호탕하게 후원금을 쾌척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우스갯소리에 같이 웃고 즐기다 보면 뷔페 음식들이 진열되기 시작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 티켓 가격이 제법 되는 만큼 주류 등 음료는 계속해서 제공이 되고 다들 든든한 배와 함께 술기운들도 슬슬 오른다.
조명이 어두워지며 그날의 DJ가 마이크를 잡는다. 음악 세션 팀들과 노래 잘하는 어여쁜 여인들도 나타나고 그날 밤의 공연이 시작된다. 음악은 전통 댄스 음악부터 히트 팝송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하나 둘 무대 앞 공간에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곱상하게 꾸미고 온 것은 온 것이고 아는 사람들끼리다 보니 신나게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부부가 함께하는 춤도 있지만, 각자 팝송에 따라 추는 막춤이 훨씬 재밌다. 미국 켄터키에서 온 한 엄마는 “Hotel California”에 맞춰 대중들이 춤을 추고 있자 어쩜 이리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아냐면서 놀라기도 했다. 미국 토박이인 그녀는 미국 문화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몰랐었나 보다. 한참을 자기 흥에 맞춰 춤추다 보면 오래간만에 신은 힐에 발도 아프고 땀이 나니 목도 마르다. 물 한 모금 마시면서 보니 못 이기는 척 참석했던 남편도 옆 사람들과 얘기도 하고 제법 흡족하게 즐기고 있다. 연애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 짝꿍의 춤사위는 매우 단순하다. 그런 묵직한 몸놀림이 제법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다들 각자의 이유로 고향에서 멀리 나와 사는 이들은 이렇게 잠깐이나마 본국의 기분을 느끼며 그날을 즐긴다. 그렇게 메이볼의 밤은 무르익어간다.
얼마 전부터 남편과 나의 대화 내용이 점점 단조로워짐을 느낀다. “잘 잤어?”, “점심은?”, “오늘은 어때, 바쁜 날인가?”, “잘 자.” 단조로운 일상 대화가 주를 이루는 느낌이다. 마침 전통 볼륨댄스 클래스가 있다는 정보지를 보고 같이 배워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을 했었다. 옛날 일본 영화 “쉘 위 댄스?”처럼 우리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가는데, 부부가 함께하는 취미로 어떤가 하고 말이다. 예전에 Mayball이야기도 하면서 잘 추더라며 추켜세워보지만, 남편의 대답은 예상대로 “No”. 대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를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펍에 가자고 한다. 예전처럼 땀나게 춤추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할 얘기도 더 많아질 것 같은데. 무엇보다 나는 그 스물여섯 살 춤을 출 유연성이 있음을 확인한 이후 제대로 춤을 배워볼 기회가 없어 아쉽단 말입니다. 아직은 아무리 졸라도 아닐 것 같고, 60대 즈음에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 “남편, 쉘 위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