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인도계, 중국계를 주축으로 다른 문화들이 어울려 사는 이민의 나라다. 나는 그곳에서도 유난히 중국계 인구가 많은 말레이시아 제2의 도시 페낭에서 살았다. 서로의 언어가 다르고 옛 영국 식민 지였다 보니 생활 속에서는 주로 영어가 통용되고 있었다. 콘도미니엄 생활에 주변 대형 쇼핑센터들이 많아 나와 같은 이방인들도 편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내가 이민 3년 차가 되던 어느 날, 운전 면허증 갱신을 위해 지방 교통국에 방문한다. 직원들은 모두 말레이시아계다. (긴 배경을 짧게 말하자면 말레이시아는 이민에 개방되어 있는 나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중국계나 인도계에게는 공무원직을 주지 않는다) 문서가 모두 말레이시아 언어인 바하사(Bahasa)로 되어 있어 구글 번역기를 돌리며 한참 씨름을 하고 나서야 운전 면허증 갱신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내가 속한 세상이 분명해진다. 이곳은 말레이시아다.
주로 아이들 등교를 시키고 나면 몇몇 엄마들이 모여 근처 식당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는 했다. 그 멤버들 중에는 유일한 말레이시아 엄마 S가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하기 시작하면서 말레이시아 현지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당시 한창 뇌물 스캔들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나집 총리 얘기, 말레이시아 사회 문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일 년 내내 후덥지근하고 뜨거운 기후 때문에 한참 끓여야 하는 탕요리는 집에서 잘해 먹지 않았었다. 그날따라 원기회복이 좀 필요했는지 나는 푹 고운 사골국물이 너무나 간절했다. 어디 소 뼈 싸게 살 곳이 없을까 지나가는 말로 물으니 S가 학교에서 차로 30분 거리, 쇠고기를 시장 도매가로 파는 전통시장을 알고 있다고 한다. 말 나온 김에 바로 다음날 방문하기로 한다. 같이 있던 엄마들도 재밌겠다며 같이 시장 투어에 나서기로 한다.
다음날 아침, 함께 도착한 이곳은 말레이 무슬림들이 운영하는 대형 정육시장. 주로 가던 중국계 시장에는 돼지고기도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이곳은 돼지고기를 뺀 소, 닭, 양 고기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시장 초입에는 당일 잡은 듯한 신선한 소 머리도 보이고, 쇠고기 부위별, 용도별로 매대에 주렁주렁 꼬챙이에 매달려 있다. 소혀, 소간 등 부속물까지 없는 것이 없다. 전통 시장에는 냉장 시설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이는 이 시장뿐만 아니라 페낭 어느 전통시장이든 마찬가지였는데 나의 이민 초기에는 그 위생 상태를 의심하고 기겁을 했었다. 예를 들자면 닭고기 매대 옆에 살아있는 닭장이 있는 식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주위를 둘러보아도 먹고 탈 나는 사람 없고, 그날 갓 잡은 신선한 소고기, 닭고기를 싼 값에 살 수 있으니 이제는 아무 거부감 없다.
시장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본 후 마음에 드는 매대 앞에 선다. 내가 원하던 소 뼈를 구경하고 싶다. 친구 S의 도움으로 바하사 말로 국물 잘 나올만한 사골 부위 추천을 부탁한다. 영어에 서툰 듯 보이던 직원이 물건 중에서도 좋은 것으로 골라 긴 통 뼈부터 잡뼈들까지 다양하게 보여준다. 가격은 한국 정육점에서 사 먹던 쇠고기에 비하면 거의 염가 수준이다. 질 좋은 사골과 아롱사태뿐만 아니라 등심, 안심 부위들을 제법 골랐는데도 그 가격이 착하디 착하다.
횡재한 기분으로 시장을 나서 일행들과 함께 근처 지역 식당에 간다. S가 동네 맛집이라고 하더니 가게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히잡을 쓴 여인들, 말레이 특유의 트로피칼 문양의 셔츠를 입은 남성들, 아이들도 배고픈 새들 마냥 받아먹느라 바쁘다. 뷔페 시스템이었는데 갖은 고기반찬, 생선 반찬, 나물류까지 쭈욱 진열되어 있고, 밥은 코코넛을 가미한 인도미로 준비되어 있다. 무더운 기후의 영향인지 간이 좀 세고 향료를 많이 쓴다. 국물을 자작하니 밥 위에 덧뿌려 먹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말레이 시장은 중국 시장과는 또 다른 매력이 넘쳐 나고 있었고, 음식들이 살짝 매콤한데 내 입맛에도 딱 맞다. 아이들 학교에서 불과 30분 자동차 운전 거리인데 진짜 말레이시아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싶다. 그날로 로컬 친구 S에게 말레이시아 바하사를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친구는 흔쾌히 매주 한 번씩 생활 바하사를 가르쳐 주기로 한다.
바하사(Bahasa)는 인도네시아 버전과 말레이 버전으로 나뉜다. 어원은 거의 비슷하나 발음이나 관용어구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다.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 인구 규모 중 4위에 해당하는 대국이고 말레이시아 인구까지 합친다면 바하사를 구사하는 인구수가 전 세계 3억 명이 넘는다. 갑자기 그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Salamat Pagi. (좋은 아침입니다.)
Terima Kashi. (감사합니다.)
생존 회화 중심의 바하사를 배웠다. 짧은 표현의 말이지만 바하사로 인사를 건넬 때 로컬 주민들 시선의 온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잠깐 방문이 아닌 이민 3년 차나 되어서야 아침 인사 정도 배울 생각을 했다는 것이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다. 그 나라의 말을 배운다는 것은 외지인을 따뜻하게 안아준 로컬 문화에 대한 작은 존경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더듬더듬 배운 몇 가지 말들은 이후 좀 더 자신감 있게 현지인들과 교류하고자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운전하고 가다가 농장 현지인과 흥정해서 과일 등을 직접 사 먹기도 하고,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주로 가는 야외 식당에도 자주 가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메뉴가 나오면 현지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더듬거리는 말이지만 나의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라마단 뷔페 by 세반하별
무슬림 국가이므로 연중 가장 큰 행사는 라마단이다. 그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물도 마실 수 없다. 공장들은 거의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사람들은 햇볕에 노출되기보다는 실내 활동을 많이 한다. 그렇다 보니 해가 진 저녁시간이 되면 야외 먹거리 시장은 불야성이 되고 호텔들은 라마단 특별 뷔페 광고들로 빼곡하다. 하루는 몇몇 엄마들끼리 모여 말레이 전통 의상을 빌려 입고는 친구 S를 따라 라마단 뷔페 행사에 가본다. 하루 종일 굶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몫으로 두 세 접시를 눈앞에 두고 달리기 직전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얼마 후 무슬림 기도문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식사를 시작하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역시나 다이어트는 먹고 싶을 때 못 먹으면 그 보상 심리로 후에 폭식을 한다. 라마단 특별식도 마찬가지로 그 양도 많고 고 칼로리인 경우가 많다. 식전 음식부터 디저트까지 풀코스다. 종교적으로 라마단 기간에 이런 성찬이 허용되었을까는 의문이지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엄연한 사는 재미였다.
말레이시아 아침 식사로 내가 참 좋아하던 국민 음식이 있다. 나시 레막(Nasi Lemak)이라 불리는데 딱 우리네 주먹밥 같다. 볶음 멸치랑 완숙으로 삶은 계란, 오이 몇 조각 그리고 볶은 땅콩 몇 알. 코코넛을 넣어 지은 하얀 쌀밥 위에 생선향 나는 매운 소스를 끼얹어 바나나잎에 싸서 판다. 글을 쓰다 보니아침 끼니 사면서 나누던 현지인과의 대화들도 그 꼬숩게 맛있던 나시레막의 맛도 무척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