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첫 아이를 임신하고 배가 불러오는 과정이 너무나 신기합니다. 입덧도 살짝 스치듯 지나가고 비교적 건강하게 임신 기간을 보냈습니다. 회사 프로젝트 성과도 좋았고 공적 사적으로 무척 생산적인 아홉 달을 보냈습니다. 만삭이 되고 출산휴가를 시작하면서 대표님께 “3개월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당당히 인사하고 나왔습니다. 대표님도 당연히 출산휴가 후 돌아올 직원으로 생각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출산을 하고 내 팔에 폭 안겨있는 조금만 생명체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건강하게 잘 보살필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남편은 아이 기저귀 갈다가 여린 다리를 부러트릴까 무섭다고 할 정도였으니 초보 부모는 기쁨과 동시에 미지의 세계를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출산 휴가 기간이 끝나면 이 아이를 도우미 아주머니께 맡기고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에 계신 시 부모님, 이미 천사가 되신 친정어머니가 계셨거든요. 더불어 남편마저도 업무 출장이 많았습니다.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계셔줄 수 있는 어르신이 한 분이라도 계시면 좋겠다 하며 속상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휴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소규모 회사라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악착 같이 벌고 경력 쌓기에 목을 매던 나는 그렇게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아기는 매일이 성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목을 가누고, 뒤집고, 앉고, 서고, '엄마' 불러 줄 때면 하늘을 나는 듯 기뻤지요. 남편과 나는 이참에 또 다른 천사를 맞이하기로 합니다. 첫 아이 돌잔치를 하자마자 둘째 임신을 합니다. 힘들었던 첫 아이 임신 과정에 비해 너무나 쉽게 둘째 천사를 맞이하니 어리둥절합니다. 가족계획이 예상대로 척척 이뤄지던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육아를 책으로 배워하던 나는 둘째 아이는 이미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이려니 짐작했습니다. 마주한 현실은 진정한 육아 굴레의 시작, 매운맛이었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무한 반복의 일상. 두 아이의 성장 단계가 다르니 필요한 사항들도 달랐습니다. 한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노라면 다른 아이는 화장실에서 엄마를 목놓아 부르고는 했었지요. 두 아이의 수면 시간이 제각각이라 오롯이 쉴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잠깐이라도 아이들이 잠들면 온통 난장판이 된 집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아이들 쉴 때 엄마도 쉬어야 한다' 조언을 들었지만, 그렇게 못하는 성격탓도 있었지요. 한 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온 얼굴이며 옷에 음식 범벅. 두 아이를 씻기고 옷 갈아입히면서 '밥은 왜 하루 세 끼니인 거니' 농담 같은 진담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만 세 살이 되기 전까지 두 아이가 돌아가면서 아플 때가 참 많았습니다. 병원 가고, 약 먹이고, 열이라도 날 때면 밤새 마음 졸이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더군다나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와는 달리 예민해서 두 시간 이상 누워 잠자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첫 아이를 낳고 행복한 큰 언니를 보면서 두 명의 미혼 동생들은 결혼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언니가 둘째를 낳고 키우는 모습을 보며 '저러다 산후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느날 새벽, 언제나처럼 불도 켜지 않은 방 한가운데 보채는 아이 젖물리고 앉아 있는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립니다.
퇴근한 남편은 자꾸 내게 저녁 산책을 권했습니다.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나가는 게 번잡해서 그냥 집에 있고 싶을 때도 남편은 우기고 우겨 나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주말이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는 일상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 기저귀, 젖병들을 가방에 꾸리면 한 짐이었어요. 유모차, 아이들 필요 물품 등을 차 트렁크에 채우고 있노라면, 핸드백 하나 달랑 들고 외출하던 과거는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집 앞 마트에 가서 그날의 청과물들을 사 옵니다. 야채는 신선해야 한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렇게 라도 바깥 외출을 꼭 하려는 의지였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를 지나가야 했는데, 학원 광고, 요구르트 아주머니 등 외판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학교 앞을 지나가는 내 손에 중국어 방문 교사 전단지가 쥐어집니다. 그제야 '집으로 선생님을 모시는 방법도 있구나' 깨닫습니다. 주로 아이들 대상이었을 텐데 아기 엄마가 등록을 하니 흥미로워하시던 직원분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그렇게 중국어 선생님의 방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급 회화 과정으로, 교재에 있는 그날의 주제를 공부하고 본문을 통째로 외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육아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무엇인가 암기하고 배워가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물론 수업 중에 아이가 울거나 보채는 경우도 허다했지요. 선생님과 그냥 수다 떠는 시간이 되어버릴 때도 많았습니다. 방문 선생님은 한(韓)족 분이셨고, 초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선배 엄마셨습니다. 전업 육아맘으로 사시다가 일을 시작하신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중국식 요리 레시피를 나눠주시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 돌 선물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중국어 방문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둘째 아이의 첫 돌이 지나고 나니 수면 패턴이 조금씩 안정화되기 시작합니다. 기어 다니면서 뭐든 입으로 확인하던 아이가 이제는 걸어 다니면서 행동반경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1년 전보다 양육이 쉬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걸어 다닐 수 있어지니 야외 활동이 편해졌습니다. 큰 아이가 유아원에 세 시간씩 등원을 시작한 것도 큰 변화였지요. 조금씩 숨 쉴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한 야외 활동 그리고 잠시나마 육아에서 벗어나 집중할 수 있었던 중국어 공부. 그렇게 초보 엄마로서 두 아이와 힘들었던 첫 해를 무사히 잘 넘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