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방법
인생에 '무엇'을 채우는가 보다는 '어떻게' 채워가는가가 중요하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언어를 배우는 심리는 무엇일까.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 준비?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는 나만의 성취감?
나에게는 이 두 마음이 모두 존재했던 것 같다.
말레이시아 어느 뜨거운 일요일 아침, 책가방을 메고 지역 중국계 중학교로 향한다. 그동안 시간 날 때마다 갈고닦은 나의 중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오늘은 HSK(Hanyu Suiping Kaoshi) 중국어 능력시험날이다. 시험장으로 가는 길, 까까머리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중년인 나도 열심히 학교 교정에 따라 들어갔다. 중국어 과외 선생님은 말레이시아 바하사어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배려해서 대신 시험 접수 처리를 해주시고 고사장까지 마중을 나와주셨다. 학교 교정이 커서 혼자 헤맬 뻔했는데 반갑게 맞아 주시니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나 뿐만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벽안의 한 여인이 다가온다. 선생님과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가 어쩐지 낯이 익다. 아이들 학교 행사에서, 다니는 운동 클럽에서 자주 스쳐 지나간 엄마 J였다. 선생님은 우리 만학도 두 학생이 자랑스럽다며 그녀 특유의 에너지를 잔뜩 얹어 주시고는 각자 들어갈 고사장 위치까지 확인해 주시고 퇴장하신다.
J와 나는 대기 시간 30분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 어쩌다 중국어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얘기를 나눈다. J는 러시아 여인으로 남편이 일을 따라 해외 생활 한지 8년 차라고 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이 이야기하는 중에 눈에서 꿀이 뚝뚝. 남편은 출장이 많아 아들과 단 둘인 경우가 많았고, 그동안 전업맘으로 살다가 이제는 자신의 일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고 한다. 화려한 외모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혼 전 러시아에서 전문 패션모델 활동을 한 실력자였다. 2-3년마다 남편 발령 따라 거주 국가를 옮겨가며 살아가다 보니 한 곳에 정착이 어렵고 모델로서는 나이가 있는 30대라 일할 기회가 쉽지 않다고 한다. 중국어를 할 줄 알면 아시아에서 일할 기회가 좀 더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열심히 살고 싶어서 공부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국 사람이 어원이 비슷한 중국어를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러시아 여인의 노력에 대해 나는 그녀에게 칭찬을 너머 칭송 가득해주었고 각자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학교 등하교 때, 운동하러 갈 때 서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중국어 성적표 받은 다음 날, 길 건너편에 서서 서로 눈빛이 마주쳤는데 둘 다 엄지 번쩍 들어 올린 걸 보니 그녀도 나도 시험은 합격이었다. 작은 성취에 잘했다 서로 칭찬 나눌 법도 했는데, 각자 갈 길이 바빠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그 이후로 길에서 마주칠 때면 서로 바삐 눈인사만 하거나, '오늘 스쳐 지나가면 다른 날 또다시 인사할 기회가 있겠지' 하며 못 본 척 지나친 날도 있었다.
몇 달 후 아이들 하교 시간에 엄마들끼리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 전 콘도에서 추락 사고가 있었고 그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바로 J라고 한다. 로컬 신문에도 크게 났다며 변고에 대해 다들 한 마디씩 하는데 정신이 멍하다. 며칠 전에도 스치듯 지나갔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녀는 남편과 이혼 직전이었고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전업주부로만 살다가 아들과 경제적 독립할 생각에 많이 힘들어했었다고 한다. 늘씬하고 매력적인 외모에 그 특유의 서늘한 매력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다는 엄마들의 이야기다.
터 놓고 말할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닐까.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두고 그런 선택을 했을 리가.
오며 가며 좀 더 따뜻하게 인사 나눌 걸, 말을 나누면 또 곧잘 자기 얘기하던 사람이었는데.
페이스북을 보면 매일 운동하고 모델 에이전시 포트폴리오 제출도 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그 열정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생각했었는데...
해외 생활이라는 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그만큼 외로움이 있다. 생활에 변화가 있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먼 거리에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 쉽지 않다. 다행히 배우자가 단단히 지켜주는 경우에는 또 그 희망으로 살지만, J의 경우는 그도 여의치 않았었던 것 같다.
인간의 원론적 외로움 또는 두려움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무엇인가 집중하는 그 순간만큼은 근심이 사라진다. 주어진 시간과 삷을 온전히 누리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내가 찾은 방법이 외국어 공부였다. 그 과정을 잠시나마 함께 한 친구를 통해 인생은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쓰면서 일상에 스쳐 지나갈 일들에서 감사 거리를 찾는데 처음 며칠은 쉽다. 하지만 감사 일기가 거듭될수록 아주 일상적인 일들까지 들추어 감사거리를 찾게 된다. 예를 들자면 제시간에 일어난 나의 건강에 감사한다거나, 맑은 하늘에 감사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주변에 이미 넘치도록 많은 고마운 것들이 있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경험을 더해갈수록 마음의 평안함을 찾는 선순환을 경험하고 있다.
요즘도 매일 외국어 한 문단 씩 정도 읽고 모르는 단어는 단어장에 기입해 둔다. 그 일과를 마치고 나면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사 일기장을 편다. 오늘은 무슨 감사한 일이 있었더라.
'지금 이 순간, 글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이 주어짐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