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앱 프로그램에 외국어 문장을 입력하면 단 몇 초안에 바로 번역이 되고 참고 문헌까지 알려주는 AI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원서 한 권을 읽으려면 몇 달을 머리 싸매고 번역 작업을 하던 날들은 추억이 되고, AI는 단 몇 초만에 그 이야기의 줄거리, 중요한 사건, 인물 배경 설명 등 거침없이 보여준다. 왠지 횡재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도둑 맞은 것 같기도 한 기분이다.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화면의 1인치 자막의 허들을 넘으면 펼쳐질 더 넓은 세상을 이야기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었다. 이제는 원하는 무엇이든 내 책상 위 노트북 하나면 가장 내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형태로 무한 정보가 제공되고 가공된다.
이쯤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다”라고 한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여러가지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독창적일 수 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모국어가 아닌 다른 문화권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워 이해하는 과정을 말한다.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과 홍문표 교수는 강연에서 삼성전자의 새 휴대폰 광고를 예로 설명한다. 디자인은 두 문화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구매 포인트다. 하지만 모던한 신 기능을 강조하는 한국 광고와는 달리 독일 광고에는 어느 기계 장인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기술력, 내구성을 강조한다. 장인 문화를 가진 독일인들에게 어필하는 구매 포인트가 한국과는 다른 것이다. 독일 문화의 이해 정도에 따라 마케팅 방법이 달라지고 이는 그대로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간단한 기능적인 언어로써의 외국어는 AI시대 디바이스 하나로 얼마든지 묻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영국에서 이민 생활 중인 나는 매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난 외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짜릿함을 느낀다. 그중 영어는 그 언어로 일을 했고, 그 문화권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기에 제2 외국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권 밖에서 제2 외국어로 영어를 사용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도 문화의 이해보다는 소통에 중점을 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영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아는 영어는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외국어였음을 매번 부딪히며 깨달았다. 직장 동료들과 티 타임에 편안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그들의 농담이나 그 말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 사자성어처럼 내려오는 구어였거나 아니면 옛날 TV프로그램 유명 대사였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오지 않았기에 오는 문화적인 차이였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화를 이해하는데에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서로 간 이해의 간극을 좁힐수록 관계의 밀도가 달라지고 일을 수행하는 과정이 부드럽고 매끄러워진다.
AI의 편리성을 마음껏 누리자. 아주 능력 있는 비서를 둔 듯 반복적이거나 소모적인 일들은 산술적 프로세스를 하는 인공지능에 맡기고 우리는 '존재의 집이라 불리는 언어의 능력'을 키우는데 좀 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집중하자. 내 의견을 설명할 자료 준비하는 데에 드는 시간은 AI의 도움으로 눈에 띄게 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료들을 의도에 따라 표현하고 상대를 이해시킬 핵심 포인트는 사람만이 선택하고 적용할 수 있다. 최종 결정의 주체는 바로 '나'인 것이다.
인간이 쓰는 언어는 그 의미나 표현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매번 새로 생겨나고 사라진다. 인간은 상황에 맞게 단어를 만들어 쓰는 존재다. 말을 할 때의 목소리 높낮이, 은근히 풍기는 뉘앙스 등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다른 언어를 구사할 때마다 그 언어에 맞게 사고 체계를 전환하는 것이 인간이다.
외국어 공부는 이런 다른 문화와 생각을 내 생각안으로 품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AI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 나만의 창의성이 생겨난다.
책을 읽고, 배우고, 생각하며, 글 쓰는 습관을 게을리하지 말자.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세계관을 만들고 내 생각의 그릇을 넓히자.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고, 그만큼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