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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피엔드, 왜 안 봐?

by quitter

오랜만에 일본에서 나온 청춘 성장 드라마 서사의 독립영화라 생각했다. 근데 웬걸?



1. 일본 독립영화 특유의 섬세한 연출

대사 없이도 인물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었고,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게 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연출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진’ 장면. 이는 단순히 자연현상을 보여주기 위해 넣은 게 아니라, 일본 사회가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차별을 재생산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감독 인터뷰를 보면, 영화 속 지진이라는 장치는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고 한다. 모든 한국인이 알고있는 그 역사적 사실 말이다. 당사 지진이 일어난 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헛소문이 돌며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영화 속에서도 지진이 일어날때마다 차별을 바탕으로 둔 사건들이 일어난다. 시작은 재일교포인 ‘코우’ 뿐만 아니라 다문화 학생들을 향한 차별과 감시가 강화된다.


즉, 이 영화에서의 지진은 단순히 건물을 흔드는 재난이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차별 감정과 혐오가 터져 나오는 순간을 상징한다. 조명이 흔들리고, 지진 경보가 울리는 그 순간마다 사회가 ‘누군가’를 향해 다시 증오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또, 카메라 앵글도 흥미로웠다. 클로즈업보다 풀샷이 많았는데 인물들의 감정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 환경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느껴졌다.


감독 <네오 소라>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감독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오프닝과 피날레에 흐르는 음악은 그 감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몰아치듯 다가와서, 보는 내내 노래에도 여운이 남았다.



2. 단순히 청춘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로운 영혼의 '유타'와 재일교포인 '코우' 두 주인공의 우정과 성장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지만, 그 안에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들어있다.


기성세대와의 충돌, 정치에 무관심한 이들과 여전히 희망을 붙잡고 있는 이들의 대비, 다문화 학생에 대한 차별, 정치권력의 부패 등 현실 사회의 문제들이 이야기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특히나 극 중에 나온 일본의 배경은 마치 작년에 있었던 계엄 사태를 생각나게 했다. 학교와 국가는 지진으로 인한 안전을 이유로 AI 카메라 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고(디스토피아 같은 설정은 아님 그래서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짐), 총리는 대지진을 우려해 유사시 모든 결정권을 지니는 대국민 긴급사태조항을 선포한다. 이 선포로 인해 집회 및 시위 활동 등이 금지되고, 경찰들은 불시 검문 중 재일교포인 주인공 '코우'에게 지속적인 차별을 내비친다.


극 중에는 세상 문제에 당차게 소리를 내는 '후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차별의 당사자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시위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코우'도 그녀를 따라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이미 망한 세상 즐겁게나 살자고 말하는 '유타'와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마치 지진 후 땅이 갈라지는 것 처럼...



3. 열광 없는 파시즘

그렇다고 감독은 '유타'를 오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반대에 있는 인물들도 '정답'이라 확정 짓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열광 없는 파시즘'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트럼프처럼 강권적이며 힘을 내새우고, 웅변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 슬그머니 자기들이 하고 싶은 걸 밀어붙이는 은폐된 파시즘, 정치를 지극히 지루하게 만들어서 국민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걸 진행해 버리는 음습한 파시즘을 꼬집고 싶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것이 일본 특유의 파시즘이라 이야기했지만, 과연 일본만의 일일까?



4. 무겁지만, 무겁지 않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정치 이념이니 뭐니 너무 무거운 영화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끝까지 '유타'와 '코우' 두 인물의 갈등과 감정에 집중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강조하고 싶은 건 나열된 주제들은 지극히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일뿐, 이 이야기는 결코 사회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다. 여전히 이야기의 중심은 두 소년과 그의 친구들이다.


중간중간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도 있고, 청춘 특유의 엉뚱함이나 귀여움이 담긴 장면들도 있다. 감정선을 따라가는 연출과 영상미 덕분에, 오히려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거운 얘기를 하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 않다. 그리고 그 점이 이 영화의 본질 같다.


5. 선을 넘은 채 정지된 화면

영화의 연출 요소 중에는 선과 프레임을 지속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 초반에서 나왔던 육교에서 헤어지는 '유타'와 '코우'. 둘 사이에 가로등 기둥이 마치 선처럼 보인다.


'유타'는 '코우'에게 장난을 치고, 장난을 치는 그 손이 선을 넘는 그 순간 화면이 정지된다.

웃으며 장난치는 장면은 분명 따뜻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씁쓸하다.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화면은 다시 진행되고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보이며 각자의 길을 간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데?

글쎄, 그냥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안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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