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울이 와도 혼자 버텼고, 혼자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말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그게 내 방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땅을 파고드는 시점이 오면,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내가 거기까지 내려가기 전에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씩.
실제로 도움이 됐다. 예전보다 빨리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말로 꺼내는 것 자체가 뭔가를 덜어내는 일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내 우울의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 뭐가 문제인지. 뭘 바꾸면 나아질지.
당연한 반응이라는 걸 안다.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안다. 근데 기분이 나빴다. 솔직히 말하면, 꽤 많이 나빴다.
내 우울은 딱히 어떤 이유에서 생긴 게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그냥 오는 거고, 그냥 있는 거고, 그러다 가는 거다. 근데 사람들은 그걸 원인과 결과로 정리하고 싶어했다. 내 주변 환경에 대해, 내 선택들에 대해, 내 삶의 방식에 대해.
들을수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얼마나 깊게 안다고.
그리고 그보다 더 싫었던 건, 나를 바꾸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조언이라는 형태로, 그 사람들은 내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 나도 그걸 안다. 근데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처럼. 내가 틀렸다는 것처럼.
나는 그냥 내가 우울했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래서 다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내 우울을 꺼냈을 때 돌아오는 건 위로보다 해석이었고, 공감보다 수정이었다. 그게 나쁜 의도라서가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반응의 한계가 그렇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누군가의 우울을 들으면 뭔가를 해주고 싶어지는 거고, 뭔가를 해주려면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거고, 이유를 찾으면 고치려 하게 되는 거다.
악의 없는 구조다. 근데 나는 고쳐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다시 혼자 버티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게 후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용기를 냈다가 거둬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말하지 않는 게 무조건 참는 게 아닌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다 이해받는 게 아닌 것처럼.
내 우울은 내 것이다. 내가 다 알지도 못하는, 내 안에 있는 것. 그걸 꺼내서 남의 언어로 정리되는 게 맞는 일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냥 다시 조용히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