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에서 바닥을 쳤으니, 이번엔 얼마 없는 좋은 기억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솔직히 학교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인류애 상실하는 경험을 정말 많이 해서, 살~짝 과장하자면 인간에 대한 불신이 생겼었다. 혼자 하는 일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내 감정에 100% 공감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생각보다 너무 외롭고 힘든 일이다. 게다가 공감은커녕 배려와 예의조차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니 더 그랬다. 좋은 담당 선생님을 만난 건 그 자체만으로도 행운이었지만, 같은 업무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공감을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늦봄에 좋은 추억 하나를 선물 받았다. 그 추억이 남은 계약 기간을 버티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끝내 상처 받았지만, 그래도 이 기억만큼은 좋게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수서의 마지막 과정이었다. 약 500권 책이 도서관 한편에 자리 잡았다. 당연하게도 엑셀 파일에 정리한 것과는 존재감이 달랐다. 도서 업체 사람은 배달 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막막함'이라는 글자가 눈 앞에 비치는 것 같았다.
다행인지 뭔지 유난히 사람이 없는 오후였다. 다들 일찍 집에 간 것 같았다. 타이밍이 안 좋게 담당 선생님께서도 조퇴를 하신 날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함께 꽂자며 놔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마음만이라도 정말 감사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빨리 해치우는 게 내 성격에 맞았다.
노끈으로 묶인 22개의 책 덩어리를 하나하나 잘라가며 검수를 시작했다. 책을 책수레에 올려서 함께 받은 도서 원부와 대조했다. 혹시나 빠진 책이 없는지 확인하며 계속 진행하는데 도무지 줄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워진 나는 도서관 창문을 모두 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니까 좀 나았다.
잠시 열을 식히고 다시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도서관에 들어왔다.
"선생님, 이거 반납..."
서로를 발견한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동작을 멈췄다. 상대방은 수많은 책에 둘러싸인 나를 보며 놀랐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갑작스러운 이용자의 등장에 놀란 것이다. 그 사람은 1학년 담임교사였고, 전에 빌려간 책을 반납하러 온 모양이었다.
"아, 반납이시죠? 거기 데스크에 두고 가시면 제가 나중에 처리할게요."
"아, 네."
대답을 하고도 그 사람은 나가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도 그냥 뭐지? 싶었다. 순간 이 난리인 와중에 책을 빌려가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경험상 그게 가장 확률이 높았으니까. 일단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검수를 시작했는데,
"새 책 들어온 거예요?"
예상과는 다른 질문이 귀에 꽂혔다. 나는 다시 입구 쪽을 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너무 오래 걸리겠는데요?"
잠시,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뉘앙스를 보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 사람은 시계를 보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시계는 2시 20분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3시까지만 도와드릴게요."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냥 도와주겠다고? 이걸? 후회할 텐데, 싶은 마음과 양심의 가책을 담아 그 사람에게 빠져나갈 기회를 줬다.
"바쁘신 거 아니에요? 힘드실 텐데.."
그 와중에 양심의 가책이 부족했는지 안 도와줘도 괜찮다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내 준 이상, 솔직히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으니까.
"3시까지는 괜찮아요. 어떤 거 하면 될까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말을 꺼냈다.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죠? 그런 거면.."
"아뇨, 아뇨. 그냥 너무 감사해서요."
그렇게 함께 일을 시작했다. 그 사람에겐 그나마 덜 힘든 일을 부탁했다. (아까 부족했던 양심을 한 번 더 쥐어짰다) 그 사람이 종이에 적힌 책 목록을 읽어주면, 내가 실물 책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자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원래 계획은 검수만 퇴근 전까지 끝내고 책은 적당히 꽂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검수가 빠르게 진행되고, 책을 놔둘 곳도 마땅치 않아 그냥 꽂는 것까지 하기로 했다. 한층 더 미안해진 마음이었다. 그래도 책을 꽂을 때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어색함을 좀 덜어낼 수 있었다.
"선생님은 교육청 소속이신 거예요?"
"아, 저는 구청 소속이에요. 이번에 학교도서관 관련 사업이 있어서요."
"그러시구나. 그럼 언제까지 하세요?"
"올해 말까지예요."
그런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어있었다.
"선생님. 이제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남은 건 제가 할 테니까 얼른 가보세요."
"아.. 괜찮아요.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끝까지 도와드릴게요."
그래서 결국 3시 30분이 넘어서야 모든 일이 끝났다. 당시 도서관에는 정말 있는 게 없어서 그저 감사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분은 아니라며 신간으로 들어온 책 몇 개를 빌리면서 덧붙였다.
"저기 제가 도와드렸다는 거 아무한테도 얘기하시면 안 돼요. 그냥 혼자서 했다고 해주세요."
"네? 왜요? 이거 혼자서 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그냥, 괜한 소리 듣기 싫어서요. 꼭이요. 절대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선뜻 도와주신 것에 비해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이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는 워낙 이런저런 말이 빨리 퍼지는 터라 이해가 갔다. 착한 척이니 뭐니 안 좋은 소리를 하려고 들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래서 이 사건은 비밀스러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정말 처음으로 학교도서관에서 따뜻한 인류애를 느꼈다. 심지어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마저도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