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의 공간, 누와
TRAVEL ㅣ FEBRUARY 2019
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글ㆍ사진 ㅣ 변진혁
사람 한 명 정도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길이 맞나 싶은 의심이 사라지기 전에, '누와'라고 적혀 있는 작은 나무 문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느낌의 작은 문을 지나면, 작은 정원과 세련된 느낌의 크고 동그란 창이 손님을 반겨준다. 서촌의 풍류를 즐기기 좋은 작고 아늑한 한옥, '서촌 누와'다.
서촌 누와는 ㄱ자 형태의 오래된 한옥을 손봐서 만들어낸 공간이다. 시야에 걸리는 눈에 띄는 장식이나 구조물은 없다. 사람이 자주 오고 가는 길보다 하나 더 들어와야 하는 장소이다 보니, 조용하기도 하다. 실내는 편히 지낼 수 있게 요즘 사람의 터치로 고쳐냈지만, 아늑하고 고즈넉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오래된 한옥의 느낌은 그대로 담겨있다.
침실 공간. 크고 동그란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얼마나 좋을지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이불이 가볍고 아주 포근한 느낌이라 아주 개운하게 잠을 잤다.
둥그런 창밖으로 보이는 오밀조밀한 모습이 매력적이다. 개인에 따라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다분히 한옥스럽고, 서촌 스럽다.
가림막을 내려서 침실과 거실을 분리된 공간처럼 만들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왔을 때, 한 사람은 더 놀고(술을 마시고) 싶을 수도 있고, 한 사람은 일찍 누워 포근함을 즐기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흰색과 목재의 무늬만이 눈에 띄는 따뜻하고 차분한 공간.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 있다. TV가 없고, 주방이 없다. 과감하고 대담하다. 처음에는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조금 더 둘러보도록 하자.
조금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서촌 누와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차와 책 등을 즐기기 좋은 공간이다. 그래도 사람에 따라 차 보다는 커피가 좋은(나 같은) 사람도 있다. 빈브라더스의 드립백 2개가 준비되어 있다. 센스 있게 각기 다른 블렌딩이었다.
독특한 디자인의 옷걸이에는 촉감 좋은 가운이 걸려있다. 선반에는 여분의 다기와 찻잎, 티볼리 큐브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다. 페어링이 처음에 조금 어려워서 애를 먹었다. 꼭 안내서를 읽어보고 조작하도록 하자. 작은 모노 스피커이지만, 소리가 단단해서 듣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거실 중앙에는 큰 테이블이 있고, 역시 다기가 놓여있다. 누와의 유일한 전열기구인 1구짜리 하이라이트도 놓여있다. 음식을 조리하는 용도는 아니고, 차를 마시기 위한 도구 중 하나다. 테이블을 따라 시선을 끝으로 옮겨보면, 네모난 실내 욕조를 만날 수 있다.
공간이 좁은 듯하면서 넓다. 혼자여 유유자적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조금 심심하고, 둘이서 지내기에는 알맞게 번잡스러울 수 있겠다. 셋부터는 다른 스테이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욕조 이야기로 돌아오자. 누와의 가장 아이코닉 한 공간이기도 하겠다. 실내 욕조이다 보니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몸을 담글 수 있다. 둘이 왔다면, 같이 목욕을 하기에도 낯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사이어야 하겠다. 욕조는 적당히 깊고, 적당히 넓다. 물을 받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으니, 몸을 담그고 싶다면 미리 물을 받는 편이 좋다.
깜깜한 밤에는, 혹은 술을 많이 하셨다면 지나다닐 때 조금 위험할 수 있겠다. 다행히 거실의 조명이 어두운 편은 아니라서, 크게 불편하진 않다. 다만 어린 투숙객이 있다면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겠다.
욕조 사용법 등이 간략하게 적혀있는 종이, 바스 솔트와 워터-프루프 읽을거리가 놓여있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몸을 담그지는 않았지만. 누와를 찾을 사람들의 가장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깔끔하고 작은 화장실. 샤워하기에는 다소 좁게 느껴지긴 한다. 어메니티는 이솝. 욕조도 그렇지만, 샤워를 하고 나면 환풍기를 꼭 켜두도록 하자. 많은 사람들이 누와에서 좋은 기억을 갖고 가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정면에 보이는 소파 옆에 작은 냉장고가 있고, 그 위에 아주 작은 개수대가 있다. 요리나 설거지는 불가능에 가깝다. 물을 받거나, 다기를 헹구는 정도가 어울린다. 차를 끓이기 위한 1구 하이라이트 외에 조리도구도 없다. 그 흔한 전자레인지 역시 없다.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많은 희생이 따른다. 의도된 불편함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나 콘셉트가 명확한 장소를 만들어내고 실행할 수 있는 용기에는 박수를 쳐주고 싶다.
유난히도 비나 눈을 만날 수 없는 올 겨울이였는데. 누와를 방문하는 날은 축축하게 느껴질 정도로 비가 왔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다가, 작은 정원을 바라본다. 서서 바라보다 앉아서 바라본다. 큰 창을 보고, 작은 정원을 바라본다. 맥주를 넉넉하게 준비한 기억이 떠오른다. 조용한 서촌 골목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정원을 다시 바라보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누와가 바라는 풍류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보통 이런 숙박시설, 스테이를 방문하면 공간의 의도, 소개, 유의사항 등이 적혀있는 안내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기 마련인데 의외로 찾아볼 수 없었다. 기둥 한켠에 마련된 작은 책장에 실제본된 안내서를 찾았다. 공간만큼이나 개성 있는 안내서. 자연스레 꼼꼼히 읽어보게 된다.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라는 콘셉트에 어울리는 다기가 준비되어 있다. 구색을 맞추는 수준의 난잡한 도구는 아니다. 촉감이나 무게감, 만듦새 등이 만족스럽다. 차를 좋아하지 않지만, 차를 마셔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게 한다.
호기심만으로는 맛있는 차를 마시기 어렵다. 어떻게 즐기면 좋을지, 다기를 어떻게 쓰면 좋은지 친절하고 어렵지 않게 기술되어 있다. 티백으로 마시는 차도 좋지만, 가끔 한 번쯤은 이런 차도 좋지 않은가.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귀찮음 혹은 번거로움이 주는 매력이라는 게 있다.
둥글둥글하고, 창백하지 않고, 친근한 느낌의 다기를 보고 있으면, 이 다기로 차를 마시는 나를 상상해보자. 별것 아닌 행동임에도 괜히 멋있는 것 같고, 분위기 있는 것 같고,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가. 풍류라는 게, 별로 어려운 게 아니다.
남은 캔맥주를 다시 정원을 바라보면서 마신다. 빗줄기는 조금 약해졌지만, 꾸준히 내리기는 한다. 조리 도구나 식기가 없다 보니 뭔가 음식을 해먹거나, 사다 먹기는 애매하다. 오랜만에 서촌 공기나 마실 겸, 저녁을 가볍게 해결하고 오기로 한다.
잠깐 사이에 해가 떨어졌다. 정원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다. 가림막(이라고 아까부터 쓰는데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을 모두 내려본다. 훨씬 더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TV의 시끌벅적함도 없고, 음식 냄새 또한 없다. 모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선곡한 음악만이 공간을 채운다.
차 마시기에 도전해본다. 설명글을 읽어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물을 끓이고, 찻잔을 데우고, 물을 조금 식히고, 찻잎을 원하는 만큼 우려낸다. 조금씩 잔에 따라 향기와 함께 마셔본다. 음, 괜찮네. 그래도 나는 역시 커피가 좋다,라는 결론과 함께 맥주나 마시기로 한다.
맥주를 따르고 테이블에 앉는다. 창밖을 보고 싶어진다. 가림막을 다시 올리고, 정원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신다. TV는 당연히 없고, 가져온 랩톱도 가방에서 꺼낼 일이 없다. 별것 없는 소박한 정원을 보며, 음악을 듣고, 술을 마신다. 그렇게 서촌 누와에서의 긴 밤을 보냈고, 잠깐 잠이 들었다. 짧은 잠이었지만 아주 개운했다. 거슬리는 소음 하나 없는 서촌의, 누와의 공기 덕분이었을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자. 아침에 몸을 겨우 일으켜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소음과 함께 힘겹게 출근 준비를 한다. 아침밥이라도 한 끼 챙겨 먹으면 다행이다. 물이나 조금 마시고, 묵직한 커피와 함께 사무실로 힘겹게 들어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하다 보면, 허겁지겁 점심을 해결하고, 잠깐 집중하고 나면 겨우 퇴근할 수 있다. 집에 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거나, 텔레비전을 다시 켜고 대충 저녁 식사를 마무리한다. 어느새 10시, 11시가 되었고 다시 내일 출근할 생각에 살짝 스트레스를 받으며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일부러라도 내 주변을 제한시켜보자. 텔레비전도 없고, 윙윙거리는 랩톱이나 컴퓨터도 없다. 되도록 휴대폰도 자주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매일 아침, 저녁 식사를 챙겨주던 전자레인지마저 없다. 귀찮고 번거롭지만 맛 집을 찾아 길로 나선다. 오랜만에 찾아 나선 음식점은 혼자라 조금 어색하지만, 맛이 좋았다. 술도 한잔 함께 하면 더 좋겠다. 혼자 우산을 펴고 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을 따라 숙소로 돌아온다. 적막한 공기가 어색해 음악을 틀어본다. 평소 듣던 음악과는 조금 달라도 재미있겠다.
거슬리는 소음도, 시선을 방해하는 원색의 발광체도 없다. 눈앞의 활자 하나, 귀에 걸리는 소음 하나, 멜로디 하나, 달그락 거리는 술잔 혹은 찻잔의 소음 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혹은 동행이 있다면 동행의 눈썹의 움직임, 입꼬리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손은 왜 가만히 있지 못하는지, 네일은 왜 저 색상을 선택했는지, 행동, 모습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궁금해하게 된다.
불편함, 단절됨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텔레비전이 없어도, 시끌벅적한 요리와 맛깔난 음식이 없어도 괜찮다. 좋은 차와 술, 혹은 활자가 있다면, 좋은 사람이 있다면, 의도된 불편함에서 오는 풍류를 즐겨보도록 하자. 누와의 매력은 예쁜 공간, 사진이 잘 나오는 공간에 있지 않다. 의도된, 하지만 사려 깊은 불편함에서 오는 즐거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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