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공간 이야기
사극에는 항상 감초같이 등장하는 공간이 있다.
때로는 주인공의 비밀임무를 모의하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중요한 여정을 앞두고 쉬어가는 공간이 되기도 하는 이곳은 바로 '주막'이다.
하지만 우리가 방송매체로 접하는 주막의 모습은 매우 한정적이다. 부엌에서 조리를 하고 술을 가져다주는 주모와 평상위 간단한 술상의 모습들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주막의 모습은 근래 100년 사이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생소한 주막에 대해서 알아보자.
역원(驛院), 역참(驛站), 참(站), 점(店) 주점(酒店), 탄막(炭幕), 주막(酒幕)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역원(驛院)다.
역(驛)은 잠을 자지 않는 곳이다. 전해야 할 문서를 챙기거나 물을 마시고,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다. 파발마로 급하게 달리는 관리들이 이용했다. 서울 ‘양재역’은 전철역에서 시작된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이미 ‘양재역’이 있었다. ‘역원 제도’의 ‘역’이다. 양재역 부근에 말죽거리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말은 기차가 아니다. 때때로 갈아야 한다. 양재역은 말을 갈아탔던 ‘역’이다.
원(院)은 숙박, 식사가 가능한 공간이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잠을 재웠다. ‘원’은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이다. 근무자는 주모가 아니다. 관리들이 정식으로 운영했다. 한때는 전국에 1천여 개의 원이 있었다. 원은 30리마다 하나씩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조치원’ ‘이태원’ ‘사리원’ ‘인덕원’ 등이 모두 조선 시대 역원 제도의 ‘원’이다.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을 오가는 이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 숙박시설이다. 혜음원은 창건 배경과 과정,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이 기록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관료와 백성의 편의를 위한 국립 숙박시설과 동시에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인덕원이 있던 곳인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2동 은 조선시대 내관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내관들은 궁중을 출입하여 임금과 가까이 있는 신분으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이곳에 거처하며 덕을 많이 베풀었다고 해서 인덕(仁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원(院)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덕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기인 '난중일기'에도 쉬어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주막은 주로 사람들이 만나는 교통로 부근에 위치했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오가는 곳이 되었다. 시장 어귀마다 목을 축이기 위해 주막이 있었고 이곳은 이런저런 귀동냥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세상 소문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다 보니 암행어사가 신분을 속이고 주막에 들어가 민심을 살폈다. 또 각종 정부 시책을 홍보하는 장소였다. 정조는 주막에 조정 홍보 벽보를 붙이는 일을 소홀히 한 군수는 물론 지방 관원들에게 죄를 묻기도 했다.
1903년 조선을 방문한 폴란드계 러시아인 바츠와프 시에로셰프스키는 주막의 놀라운 기능을 책에 남겼다.
"모든 여행자들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묵게 되는 주막 주인에게 돈다발을 건네주고 영수증을 받은 뒤, 이후에는 그것을 돈 대신 사용한다. 주막 주인들은 영수증에 여행객에게서 받아야 할 숙박비나 식대 그리고 기타 사소한 물품비를 표시해둔다. 여행자가 마지막에 머무는 주막의 주인은 여행자의 영수증을 받고 남은 돈을 내주게 되어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어음이나 신용/체크카드의 활용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이미 100년 전부터 이러한 금융경제가 주막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게 매우 놀랍다.
(심지어 기록에서는 "여행객이 규칙을 어기거나 돈을 악용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주막은 숙박뿐만 아니라 여행자들을 위한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에 다 담지 못했지만 때로는 행려병자의 치료와 빈민구제 사업도 겸했던 다양한 목적의 시설물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멀티플렉스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멀티플렉스도 극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 주막의 모습과는 많이 닮지는 않는다.
주막이야말로 멀티플렉스를 넘어선 멀티플레이스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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