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보다 효과적인 해독제가 필요하다.
폐쇄적인 공간인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병구는 무지개 너머의 희망을 바라며 가학적인 고문들을 통해 진실을 얻으려 한다. 이런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인식되게 한다. 그가 고문을 행하는 지하실은 예전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이며, 고문에 사용되는 도구들과 본인이 쓰는 물건들은 병구에게 추억이 깃든 것들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병구가 주장하는 논리들에 상반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병구는 과거의 일들로 인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해왔다. 그 모습은 외계인을 처치하고 지구를 지키려는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자신의 상처와 분노로 인한 복수를 합리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괴물 같은 병구를 만들어 낸 것이 '사회'라는 사실이 과장된 이야기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씁쓸하다.
이 모든 것이 실은 엄청나게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다소 코믹적으로 행해지는 장면들은, 웃으며 볼 수 없게 하는 모순을 경험케 한다. 강 사장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부정부패를 일삼던 강사장은 아무리 고문을 당해도 죽지 않고 질기게도 버텨내는 절대악을 상징하는 것 같다. 반면에 병구는 그런 사회적인 강자를 제어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이겨내지 못하는 사회적인 약자일 뿐이다. 그런 병구가 자신의 분노와 트라우마를 통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모습은, 왜 인간이 분노 유전자를 조절하지 못하고 같은 종족에게 폭력을 가하고 죽이는가와 자연스레 하나의 의문으로 귀결된다.
현재 병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픈 어머니에 대한 희망이다. 이는 병구가 강사장의 카드에서 어머니의 병원비만을 인출한 것과 연결되어, 병구의 목적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인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이후에 더욱이 이성을 잃게 된 병구는 끝내 비극을 맞이한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안드로메다 왕자의 "지구에는 희망이 없다"는 대사와 맞닿게 된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의 끝에서 관객은 사실이라 믿어왔던 것들은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사실로써 인정되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의 현실도 그런 것 같다. 진실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 그 둘을 혼동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