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희야, 내가 많이 아파.”
꾹 참다가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반들거리는 나뭇잎 위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눈물은 참아볼 틈을 주지 않고 땅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이어 말했다.
“지희야 나는 천 원으로도 죄를 지었어. 결국에 내 지난 삶들은 그 작은 것들 사이에서 내내 분투하다가 사라질 거야. 괜찮다고 말해줄 것들은 떠나가 버렸고, 남들은 선행으로 인정받는 것들이 나에겐 죄가 되어버리잖아. 이것도 내 몫이다 내 숙명이다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 하는 거야?”
“…….”
앙 다문 지희의 다홍빛 입술을 보며 말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야 세상을 전과 다르게 볼 수 있을까?”
“..…”
지희의 다홍빛 입술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여짓거리며 꿈틀댔다.
“응?”
“그게.... 그래도 있잖아 은아야...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널 위해서. 인생 별거 없어. 그러니 네 삶 다시 살아내야 해”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들을 뱉어낸 지희의 두 입술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 붙었다 떼어졌다를 반복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흰 치아가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게 있잖아, 너무 생각이 많아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같은 일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의외의 방향으로 전환되기도 하거든. 간혹가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그래. 난 네가 생각을 좀 줄이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어.”
“나는 아닌 척, 누구보다 깨끗한 척 위선인지 연기인지 모르게 끝도 없이 사람을 농락하고 배반해왔어. 그걸로 모자라 네 기도를 더럽혀왔어. 이 크고 많은 죄를 어떻게 다 용서받을 수 있다 생각하는 거니?”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이 말들 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지금 네 기분, 상한 게 아니라 오히려 위로받았다는 거 알아. 우린 서로 눈만 봐도 끄덕일 수 있는 사이잖아. 안 그래?”
지희를 품에 안고 한참을 있었다. 자그마한 손이 내 등위를 위아래로 왔다갔다 할 때, 나는 정확하게 위로 받았다. 지희 집을 나와 언덕 아래로 내려가다가 옆길로 빠져 마을의 강가에 들렀다. 한참을 앉아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가 일어서 물 가까이에 섰다. 발아래에 있는 돌 중 가장 못난 것을 집어 들고 흐르는 물결 사이로 힘껏 집어던졌다. 돌은 물속으로 그대로 곤두박질 치더니 어떤 물의 움직임도 연장해내지 못했다. 이번엔 조금 예쁘장하게 생긴 돌을 집어 들었다. 던지려고 머리 위로 힘껏 손을 올렸다가는 그대로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돌이 내가 밟고 있는 것들과 다시 하나가 되었다.
딱 한 발자국이었다. 한 발자국 뒤에 서서 바라보니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수많은 돌들도, 흐르는 강물도, 내 뒤편에서 물에 젖은 몸으로 장난을 치던 어린아이들도, 내가 바라보던 세상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실 하나만 당겨도 일그러지던 나와는 다른 것 같았다. 그동안에 내가 추잡스럽다고 느껴오던 많은 일들, 그 모든 수치스러움들이 사실은 다른 의미를 가졌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과 불행, 불안과 안정. 이 모든게 실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진 않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게 공존하던 도시. 거기야 말로 나에게 최적화된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그동안에 듣지 못했던, 너무 뻔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면 나는 그것들 속에서 잘 감당하는 척 허우적대곤 했다. 그렇지 못하면서 그런 줄 아는 것들.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래도 별 수 없었다. 그게 내 오랜 습관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버리지 못했다. 나는 다시 나를 선택한 채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