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무작정 떠난 도피처에서 얻은 뜻밖의 안정이 있었어요.
내가 지나온 곳들이 폐허라고 여겼었는데 왜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 그렇게 많은지 궁금해졌어요. 작은 몸으로, 크지만 크지 않던 곳에 서성이던 날들을 기억해 줘요. 왜 저는 우리가 걷던 거리가 아닌, 당신이 걷던 거리를 걸어보고 난 후에야 마음을 다 잡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속에서 제가 본 건 시간이에요. 결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이 흘러버린 시간. 그렇기에 한참을 되돌려야 제가 보기 원했던 그 시간이 희미하게나마 보여요. 왜 제가 당신의 그 부족한 시간을 부러워하게 됐는지 절대 모르실 거예요.
사라진 아이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영원히 그의 곁에서 부재할 수밖에 없는 그 아이의 사정을 알 순 없는 것처럼요.
빨리 가는 것, 그 옆에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옆에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 그 사이마다 우리의 시간을 새겨 놓을게요.
절망이 거듭되어야 삶이 잔잔해진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