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이 처참히 강간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 지 7개월, 엄마 밀드레드는 마을 외곽의 사용하지 않는 세 개의 광고판에 도발적인 메시지를 요청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녀는 큰 집중을 받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광고판의 문구를 볼 수 있는 방향은 마을로 들어가는 때이다. 밀드레드는 마을을 드나들면서 그 문장을 수없이 마음속에 새겼을 것이다.
광고판이 세워진 후 그녀는 경찰서장 윌러비와 그의 동료 딕슨,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대립하고 계속해서 충돌하며 고독한 싸움을 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단연 캐릭터들 간의 개성이다. 밀드레드는 연대 책임에 대한 생각이 강한 사람이다.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여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숨겨둔 연약함이 고개를 들 때도 있다. 경찰 서장 월러비는 인간적이며 가정적인 사람이고,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연민과 좋은 평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마마보이 기질이 있는 딕슨은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이고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의 표본이기도 하다. 꽤 거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인물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 각자에게 몰입이 되어서 감정, 행동들에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선과 악의 구도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영화가 공권력과의 대립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저 장치에 불과할 뿐이다.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주제 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미국을 축약해 놓은 듯한 에빙의 모습은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윌러비의 편지가 이들 각자에게 전해지고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딕슨은 밀드레드와 수평적 관계에 놓여있었다가, 직선상에 자리하게 되는 변화를 가져온다. 양극단에 자리하던 이들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가진 힘으로 인해 얼마나 큰 위로를 건네받는지 볼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정말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을 뿐임을 알았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은 진심 그대로의 사과와 용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들에게서 서로에 대한 분노는 소멸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거나, 이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과도할 정도의 신파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가볍게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의 플롯 전개들이 신선하고 굉장한 몰입력을 갖게 하는 힘을 가진 영화이다. 감독이 전하는 쓰리 빌보드의 치밀하고 탄탄한 구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