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박이다
"나는 호박이다."
그런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 스스로가 그렇게 이름을 새겼다.
세월이 나를 거칠게 빚어 이제는 늙은 호박이 되었다.
겉껍질은 울퉁불퉁하고, 주름이 깊게 패여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지간한 사람은 나를 보는 순간, “늙은 호박처럼 못생겼다”고 말하고 싶을텐데 그 충동을 참아내느라 마음 고생을 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얼굴은 아름다움으로 기억되지만, 호박의 얼굴은 못생김으로 비유된다.
호박은 억울하다.
풋호박일 때는 반찬이 되어 밥상 위의 허기를 채우지만,
늙으면 죽으로, 엿으로, 약재로 쓰인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힘은
그 늙음 속에 깃들어 있다.
오늘 아침에 친구가 내게 호박찜을 만들어 주었다.
소금기 어린 새우젓에 숙성된 호박찜, 소박하고 꾸밈없는 한 접시.
밥과 함께 먹는 그 맛이 이토록 깊을 줄, 나는 미처 몰랐다.
늙은 호박의 참맛은
젊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순간에 깨달았다.
빛나지 않아도, 눈길을 끌지 않아도
시간이 응축한 단맛은 남아
조용히 삶을 지탱한다는 것을.
사람도 그렇다.
젊음에는 찬란한 자리가 주어지지만,
늙음에는 따뜻한 쓸모가 남는다.
젊음은 눈을 즐겁게 하지만
늙음은 속을 채운다.
나는 늙은 호박이다.
투박한 겉모습 아래
여름의 햇살과 바람,
비와 서리가 응축되어 있다.
남루해 보이는 이 몸 속에
세월이 빚은 달콤함이 숨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억울하지 않다.
늙음은 버려지는 운명이 아니라
다른 쓰임으로 완성되는 길.
나는 기꺼이, 늙은 호박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