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두 번째 편지
밝은 낮, 햇살이 반짝입니다.
안녕하세요. 선물님.
선물이 되고 싶어 선물작가라는 필명을 쓰신다니 제 마음대로 선물님이라고 불러 봅니다.
다른 호칭을 원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저에게는 ‘나무’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첫 편지를 받고 시간이 너무 흘렀네요. 이제 곧 추석이 다가오는 9월 초라니.
이제야 답장을 쓰면서 머쓱합니다. 미안합니다. 거의 반년만의 답장이라니. 체면을 차리자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라도 쓰는 게 낫겠지요. 우리의 편지는 앞으로도 오고갈 테니까요. 미안한 마음에 앞으로의 기대를 살짝 포개봅니다.
며칠 전 역대급 태풍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다행히 제가 사는 대전 동네는 별 피해가 없었는데 선물님 사는 영월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이곳에서는 태풍 때문인지 어제 오늘 아주 화창한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과 초록 잔디가 이렇게 선명하게 반짝이다니, 하면서 감탄을 하고 있지요.
반짝임은 본디 빛 자체에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이 감지하는 반짝임이란 사실 빛과 사물의 마찰이 아닌지요. 태양이 지구로 내리꽂은 빛줄기가 한 사물을 만나 반사될 때, 그 마찰력의 표현이 반짝임으로 우리 눈에 포착됩니다. 그러니 반짝임은 사실 갈등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요?
지난 편지에서 선물님이 감각적으로 묘사한 ‘두려움’.
그 두려움도 혹시 반짝일 수는 없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무언가 마주치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막연하고 불투명한 것, 확정되지 않은 것이 두려움이 야기합니다. 즉 두려움을 만드는 것들은 아직 나와 부딪치지 않은 것들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갈등이 없는 것이 두려움을 만든다는 말도 되겠지요. 참 희한한 일입니다. 두려움은 갈등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라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두려움. 아주 흔한 감정이기에 상담실에서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자주 마주합니다. 상담실에서 숱하게 마주하는 두려움을 봐도 앞서 말한 것과 동일하게 생각이 매듭지어집니다. ‘사람들은 갈등을 겪느니 두려워하기를 선택한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갈등을 겪기도 전에 두려움을 미리 겪습니다. 그래서 선물님의 말대로 두려움이란 대상이 없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잠시 무서운 귀신을 본 것 같은 착각.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아지랑이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장면. 이렇게 실제로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있지 않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까요? 더 나아가 두려움조차도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이라는 책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두려움 FEAR은 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라고 하더군요. 두려움은 사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라고 합니다. 너무나 리얼해 보이는 가짜들. 참 안타깝게도 우리 문화에 참 많은 것들이지요. 진짜 같은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을 살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기억하려고 합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쉽게 두려움을 느꼈던 지난날들이 내 삶을 어떻게 제약해 왔는지 뼈저리게 아파하기도 했었어요. 조금만 두려워도 도전을 회피하고 안전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온 과거, 그 결과 내가 살게 된 현재의 내 삶이 참으로 마음 아팠던 적도 있습니다. 이게 과연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나 자신에게 할 짓인가. 다시 산다면 조금 더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두려움에 발목 잡히는 현재를 보면서 조금만 더 전진해보자고 스스로 이야기를 하지요. 똑같은 과거를 만들 수는 없다. 아 이렇게 쓰면서도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과거의 나를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이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네가 느끼는 지금의 그 두려움은 환상이야. 수많은 가능성이 두려움으로 포장되어 오는 거야. 두려움이야말로 전진하라는 신호야.’ 진부하지만 그 친구를 꼭 안아서 몸과 마음의 떨림을 잠재우고 할 수 있다고, 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예전의 나에 하고 싶은 말을 쓴 바로 지금 눈물이 터지고 말았어요. 그 친구를 조금 더 사랑하고 싶어요. 조금 더 진실하게 말이지요.
선물님이 저에게 언제 두렵냐고 물으셨지요. 지금은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요. 참 후회스러웠던 과거와 똑같이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 두려워요. 비슷한 몸과 마음의 떨림을 느끼며 다시금 회피하며 안전한 길만 모색하며 나이가 들까봐 두려워요. 그리고 이게 바로 선물님이 말했던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방식이겠지요. 살아온 대로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것. 사실은 죽음을 향해 매우 순조롭게(!) 여행을 하는 것. 이런 식으로 보면 평범하게 산다는 건 굉장한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문득 선물님의 마음이 더 이해가 되네요.
어쩌다 보니 같은 지점에 이르렀어요. 마음의 같은 골목, 영월의 동네 어귀에서 갑자기 선물님을 만나고 있다는 상상이 듭니다. 선물님의 말대로 동화를 꿈꾸는 어른이 전혀 미친 걸로 보이지 않는 세상, 그게 곧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꿈을 포기한 어른들만 사는 세상은 저도 살고 싶지 않네요. 선물님의 꿈, 그것이 설령 공상이나 망상이라 불러야 합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꿈을 응원하고 싶어요. 어떤 갈등이 생기더라도 내 삶을 추구할 용기를 내는 사람은 그 갈등 자체에서 눈부신 반짝임이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갈등, 마찰이 없으면 반짝임도 없다고 앞서 말했지요.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시 제 두려움으로 돌아와 한 가지 제 생각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혹은 두려움을 잘 살기 위해 종종 생각해보곤 하는 게 있거든요. 오늘 어느 순간 문득 죽는다고 해도, 정말 잘 살다가 죽는다며 행복하게 웃는 제 모습을 떠올리곤 해요. 그렇게 정말 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사는 것도 덜 두려울 수 있지 않을까요? 궁금해요. 선물님은 정말 잘 죽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살아가세요?
2022.9.8. 11:39 대전에서 상담사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