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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Oct 03. 2024

두려움

선물작가의 첫 편째 편지 

어둔 밤, 강물이 출렁입니다.

안녕하세요, 나무님.

나무 둘 울림 상담소를 떠올리곤 제 마음대로 나무님이라고 불러 봅니다.

내키지 않으면, 다음 편지에 얘기해주세요.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새벽이 깊어갑니다. 봄비는 세차게도 내립니다.

봄비라고 하면 새싹을 자라나게 하는 보드라운 촉촉함이 떠오르는데, 오늘 밤은 그렇지 않네요.

땅에 얕게 묻힌 씨앗은 살아남지 못하는 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영월에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영월읍에서 동강이 보이는 유일한 원룸에 앉아 편지를 씁니다.

베란다 창 너머 보이는 영월대교엔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네요.

저 멀리 큰 동강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만 줄기차게 다리를 건넙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석영 난로 위에 올려둔 주전자에서 작은 기포가 하나, 둘 올라옵니다.

유리 주전자 바닥엔 아주 작고 무수히 많은 기포가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주고받자고 얘기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펜을 들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마음에 수많은 감정이 기포처럼 빼곡해서 뭘 골라 첫 편지를 써야 할지 고민하다 많이 늦었네요.

상담사라는 직업 특성상 이미 여기까지 편지를 읽으면, 제가 무슨 감정을 골랐는지 알 것도 같은데요.

제가 드러내고픈 첫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지만,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고는 다른 감정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더군요.

두려움이란 게 심야의 골목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도 느끼겠지만, 공부했든 안 했든 시험지 앞에서도 느끼는 듯해요. 내가 공부한 게 나왔을까 싶은 두려움, 이 시험을 망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같은 거요. 두려움은 어떤 대상이 있을 때만 느끼는 걸까요?

저에게 두려움이란 공포와 불안과 걱정이 한데 어우러진 감정입니다. 이 두려움은 항상 제 안에 있지만, 늘 느끼는 건 아닙니다. 냉장고 모터 소리 같지요. 갑자기 위잉하고 돌아가서 시끄럽기도 하지만, 보통은 돌아가고 있는 줄 모르거든요. 특히나 한밤중에 혼자 책을 읽다가 모터 소리가 멈추면, 갑자기 적막이 시끄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멈출 때까진 인식을 잘하지 못해요. 저에게 두려움이 그렇습니다. 냉장고가 제 기능을 하려고 쉼 없이 돌아가던 모터처럼, 두려움은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에겐 대상이 있어야만 두려운 건 아닌 듯해요. 그래서 더 두려운 게 많은 것 같고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까요?

제가 제일 두려운 건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부모를 먼저 보내고 고아가 되지요. 우리 부모님도 고아고요. 사실 부모보다 늦게 죽는 게 두려웠는데, 이건 좀 불효에, 사이코 같아 보이니까 고상하게 말해 봤어요. 게다가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혼자 남은 엄마보다 먼저 죽는 건 아무래도 못할 짓 같더라고요. 죽음으로 가는 길이 가깝게 느껴질 때마다 엄마보다 늦게 가자, 두려워하는 고아가 되어 보자, 뭐 이런 생각으로 버팁니다.


또 전 평범하게 살까 봐 너무 두려워요. 초등학생 때는 소공녀 같은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어쩌면 산타 할아버지나 요정 같은 게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고백하면 아직도 9와 3/4 정류장 같은 데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해요. 나무님이 망상이라고 걱정할 지도 모르겠어요.

왜 어린이일 때는 순수한 거고, 어른이 되면 미친 걸까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걸 배워왔는데 아직도 저런 동화 같은 걸 믿는 게 이상하다고들 하죠.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합리적인가요? 각자의 삶과 이해 등으로 개인의 프레임을 갖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걸 인정한다면, 동화를 여전히 믿는 사람도 순수까진 아니더라도 미쳤다고만 볼 순 없지 않을까요?

어쩌면 어릴 때는 동화 같은 세상을 꿈꿀 수 있어서 힘들어도 행복했을지 몰라요. 어른들은 동화같은 상상조차 하면 미친 취급을 받는 이 현실이 쉬이 변할 리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 희망조차 가질 수가 없는 게 아닐까요? 그나마 로또 당첨이 유일한 희망인 사람들과 동화를 믿는 저는, 정말 다른가요?     

평범하게 살까 봐 두려워서,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할까 두려워서 저는 소설을 씁니다. 평소엔 이렇게 말해요.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라든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소설을 통해 미치고 싶어요, 처럼 제가 제 삶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사실 두려워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일까 봐,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일까 봐. 그렇다고 두렵지 않은 일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 일은 가슴이 설레지 않아요. 용기는 두려우니까 내는 거잖아요. 두렵지 않은 일이라면, 끝이 보이고 과정이 빤하겠죠. 전 매 순간 용기가 필요한 일을 하고 싶어서 소설을 써요. 다리 위에서 안전하게 건널 걸 잘 알면 용기가 필요없지만, 다리를 건너는 일이 두렵다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정성껏 내딛을 테고, 건너는 동안, 그리고 건넜을 때 용기 내길 잘했다고 느낄 거예요.

용기를 내려면 두려움이 먼저고, 전 제가 두려운 게 많아서 용기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오늘처럼 세찬 봄비에 땅이 패일 것 같은 밤엔 더 두렵긴 해요. 그럼에도 땅을 꽉 붙잡고 쓸려가지 않도록, 싹을 틔우도록 애써보려고 해요.


나무님은 언제 두려우세요?

  

2022.3.26. 01:32. 영월에서 선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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