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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Feb 02. 2022

무지개 나라를 떠나 먹는 잡채 맛이란

태평양 건너 남의 나라에서 보내는 설날

웃긴 얘기지만 사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설을 비롯해 명절을 그다지 열심히 챙기지 않았었다. 아마 대한민국의 30대 미혼 남녀들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일정 나이가 지났는데 (1) 결혼을 안 했거나 (2) 취직을 안 했거나 (3) 결혼을 했는데도 아이가 없거나 (4) 취직을 했는데도 대기업이 아니거나, 여하튼 아주 많은 카테고리에 해당되는 이들은 명절에 친척들 모이는 곳에 있어봤자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인생의 인과관계(왜 아직 결혼을 못 한 거니 왜 아직 취직을 못한 거니 왜 그런 회사에 들어간 거니 등)를 해명해야 하는 자리가 버거웠고 그래서인지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명절 연휴에 혼자 해외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조용히 혼자 남아 있곤 했었다. 나는 삼시세끼 한식 안 먹으면 못 사는 사람도 아니기에(아침은 늘 빵이나 부리또 해 먹는 1인) 명절 음식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 와 있으면 이상하게 명절이 뭔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다른 한국인 유학생들이 명절인데 뭐 먹을 거라도 싸들고 와서 같이 포트럭 파티를 하자기에 그래 마침 여기 날짜로 설날인 오늘 별다른 일정도 없고 하니 밥이나 같이 먹자고 모였는데 다 같이 모여 먹어서 그런가 음식들이 다 하나 같이 맛있었다.


막상 한국에 있을 때에는 늘 밥상에 올라와도 손도 안 대던 나물인데 자꾸만 젓가락이 가고, 된장찌개도 엄마가 끓여주실 땐 시큰둥했던 메뉴인데 여기서는 두부 한 조각 애호박 한 조각이 왜 그리 소중하고 단무지를 곁들인 김치볶음밥은 또 왜 그리 맛있는지. 어쩌면 우리는 명절을 핑계 삼아 우리들 지나온 삶의 시간들을 곱씹어 먹는 일들을 하고자 모인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서 익숙한 음식을 입에 넣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타지 생활에서 큰 힘이 된다.


한 3개월 전쯤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 캠퍼스를 깜짝 방문한 일이 있었다. 아마도 미국 본토를 방문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리 예고도 없이 당일 아침에 펀치보울 일정 다음에 갑자기 방문하신 거라, 당시 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는데도 일정이 다 끝나고 캠퍼스를 떠나신 후에야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한국에 있을 땐 대통령 순방 기사가 떠도 별 감흥 없었다. 뉴스에서 현지 교포들이 막 현장에 찾아와 손을 흔들고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저렇게 신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내가 그 입장이 되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마치 타향살이하고 있는 나를 응원하러 저 멀리 한국에서 부모님이 맛난 거 잔뜩 사들고 기 세워주러 오신 기분이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통령 내외분을 보고 인사를 나누고 손을 흔들었다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요즘은 영상통화도 너무 쉽고 증강현실이네 뭐네 꿈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을 내포하는 것 같다. 설을 핑계로 내 나라와 그곳의 가족들 친구들을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날이어서일까. 점심에 나눠 먹고 남은 잡채로 내일은 잡채밥을 해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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