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역설
"유학 가면 한국인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외국 나가면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게 누군지 알아? 미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이야."
"한국인 커뮤니티 나가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
대학원 합격이 결정된 후 출국을 앞둔 나에게 유학을 마쳤거나 하고 있는 선배들이 하나 같이 공통적으로 해준 말들이 있었다. '미국 가면 한국인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게 그것이었다. 선배들은 그 이유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가긴 했다. 처음 이민 간 한국인들이 제일 사기를 많이 당하는 케이스가 바로 같은 한국인이라고 덥석 믿었다가 전재산을 날리는 경우라고 했다.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에 굳게 결심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한국인들과는 가깝게 지내지 말아야지.
그런데 막상 타국에 와보니 그게 어디 쉬운가. 아무래도 남의 나라 말로 떠드는 것과 내 나라 말로 떠드는 것은 뇌의 가동 정도가 다르다. 똑같이 1시간 떠들어도 전자가 후자보다 에너지 소모가 훨씬 크다. 미국 땅에서 태어난 이중언어 화자(bilingual)가 아닌 이상 영어로는 아무리 떠들어도 마치 한국인이 하루 종일 삼시세끼 빵으로 때우는 것과 같다. 잠결에도 일장연설이 가능한 한국어로 떠들어야 마치 김치 한 장 쭉 찢어 밥숟갈에 얹어 먹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마침 내가 처음 입학했던 해에는 한국인이 나밖에 없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국인 친구들하고만 지냈다. 염려했던 것보다는 다행스럽게도 미국인 친구들은 내 영어가 부족한데도 나름 잘 받아주었다. 모두와는 아니지만 제법 제일 친한 친구들도 개중 생기고 어디 놀러 갈 때면 나를 꼭 껴주는 친구들도 제법 생겼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내 나라 말이 아닌 이상 가끔 그들이 하는 말을 단번에 못 알아듣거나 혹은 잘못 알아듣고는 엉뚱한 소리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 친구들은 아무 말하지 않음에도 괜스레 눈치가 보이는 나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지거나 이들이 나를 멍청하게 보지 않을까 답답하게 여기지 않을까 마음이 쓰이곤 했다.
지난 학기에 처음으로 한국인 학생들이 꽤 입학하면서 내게도 한국인 지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같은 학과 동료이거나 같은 교회를 다닌다던가 혹은 같은 한국 학교 출신이라든지 비슷한 공통분모가 있었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점 외에는 그들과 공통적으로 엮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 됐든 한국인 커뮤니티가 아주 작게나마 생겼고 나도 가끔 초대를 받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왜 선배들이 그렇게도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비단 한국인이 유난히 다른 민족에 비해 사기를 잘 친다거나 못됐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영어에 비해 한국어로는 더 고급 내용의 대화 구사가 가능하니 그렇게 이민 사회에서 사기가 빈번한 것이다. 영어로는 사기를 치고 싶어도 일단 말이 잘 안 통하니 안된다. 며칠 전에는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내 휴대전화로 스팸 전화가 걸려왔는데, 어찌나 빨리 말하던지(우리나라 스팸전화도 어떨 땐 너무 빨라서 못 알아듣는 1인), 못 알아들은 내가 몇 번 쏘리? 쏘리? 하고 물으니 전화가 알아서 뚝 끊겼다.
그리고 모국어로 소통이 너무나 가능하다 보니 당연히 뭐든 말이 금방 퍼진다. 내 생각엔 선배들이 한국인을 멀리하라고 했던 이유 중 이게 가장 주효한 이유인 것 같다. 같은 말도 뉘앙스가 아 다르고 어 다른데, 한국어로는 그게 고스란히 전달이 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그 원래 뉘앙스에 더 많은 말들이 얹어져서 이리 퍼지고 저리 퍼진다. 누군가 아침 출근길에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영화 보러 간다고 한 말이 퇴근할 때 즈음에는 '다음 달에 퇴사한다'는 내용으로 퍼져 있었다고 했던가? 워낙 학교에서 읽고 쓰는 일만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남의 일에 관심도 많고 미주알고주알 떠들기도 좋아한다. 연이은 퀴즈와 발표로 지친 한 학생이 어두운 표정으로 귀가를 했는데 그 얼굴을 본 누군가가 요새 그 학생에게 어디 안 좋은 일이 있는 거 아니냐 한 말이 나중에는 그 집에 우환이 있다더라 하고 퍼지는 경우도 보았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이건 뭐 공부하느라 피곤해도 어디서든 한국사람들 시선 의식해서 미소 짓고 다녀야 하는 건가 싶어 씁쓸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는 이럴까? 잘 모르겠다. 이게 비단 한국인들의 국민성 때문만이 아니라면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들 커뮤니티에서도 일어날 것 같은데 내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니 알 길이 없네. 게다가 다른 나라 친구들에게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기에는, 그건 또 한국인 얼굴에 먹칠하는 것 같아서 차마 못하겠다. 타국에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서로 뒷담화하고 파 만든다고 하면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나? 미국인들은 너무 개인주의적이라서 문제라지만 또 한국인들은 이렇게 너무 서로에게 관심도 많고 나와 다른 걸 못 견디는 국민성이라 그런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꼭 한 번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딱히 사이가 안 좋은 한국인 친구도 없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친한 한국인 친구도 없다. 누가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만나(서 잘 놀)기는 하지만 굳이 내가 먼저 연락해서 보자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 이야기가 누구 입에 오르내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다(물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만은). 입방아에 오르느니 차라리 외로운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어떨 땐 또 외롭고 답답하기도 하다. 사람은 왜 이리 모순덩어리일까.
따지고 보면 꼭 유학생활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 같다. 이미 결혼하신 분들은 종종 배우자가 어디 출장이나 여행을 가서 오래 자리를 비울 때면 의외로 기쁘다고 하는 걸 보았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막상 24시간 365일 붙어있으면 힘든 것이다. 하긴 나도 예전에 애인이 일주일 휴가 내서 매일 같이 만난 적이 있는데 한 나흘 연속으로 만나고 나니 지겨워서 '아 이제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갖고 싶다'라고 생각했었지....
본의 아니게 사람에 치였던 지난주, 우울함과 스트레스가 치솟아 참다못해 혼자 훌쩍 식물원으로 바람 쐬러 나갔다. 일부러 택한 나 홀로 나들이였건만 다녀오는 내내 마음 한편은 쓸쓸했다.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사 마시는데도 어딘가 우울했다. 누군가와 같이 갔다 해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외로움과 유학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걸까? 이미 결혼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한다고 해도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으며 혼자서 외롭지 않은 사람만이 결혼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들 하던데, 혼자 있는데 외롭지 않을 수가 있나? 아직 결혼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렇다고 딱히 해법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인간관계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