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배움의 자세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엔 '망신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인 것 같다. 미국에서 처음 수업을 들을 때 놀랐던 것 중 하나가 미국애들이 질문하는 걸 가만 들어보면 '이런 걸 질문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 기초적이거나 황당한 질문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기말고사가 다음 주인데 중간고사 범위에 해당하는 질문을 (그것도 마치 지금 처음 깨달았다는 듯이) 한다든지(즉 자신은 중간고사 범위를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는 걸 아주 당당하게 드러내는 셈 아닌가), 교과서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엄청 심각하게 한다든지(영어는 다들 유창한 탓에 얼핏 들으면 아주 수준 높은 질문 같은데 자세히 들어보면 절반은 이런 질문들), 한국이었다면 그런 건 학생인 네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타박을 들었을 법한 질문을 한다든지("교수님 책 제본은 어디서 해요?").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들었을 때 단 한 명의 교수님도 면박을 주거나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아주 진지하고 성의 있게 대답해준다는 것이었다.
어제는 수업을 듣다가 조금 무안한, 아니 사실은 많이 속상한 일이 있었다. 매 시간마다 학생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그날 배정된 논문을 발표하는데, 어제는 내 차례였고 며칠 동안 준비해서 차분히 발표를 하였다. 그런데 다 끝나고 나서 교수님 왈, 단순히 리포팅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 논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약점이 없는지 살피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맞아, 이 수업은 유명한 논문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논문들이 정말로 의미가 있는지 살피는 수업이었지. 논문을 이해하기 급급했던 나는 그 논문과 관련된 다른 논문 두 편을 더 읽고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내가 그날 발표한 논문은 사실 데이터 분석 기준도 모호했고 애당초 실험에 사용된 예문부터 문제가 있었다. 결과 분석에 있어서도 본인들이 관심 있는 요소만 강조해서 언급하고 조금 의아한 수치가 나온 부분은 의도적으로 언급을 꺼린 것도 수업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괜찮았다.
무안한 일은 바로 그다음에 일어났다. 그렇구나, 하고 깨달음도 잠시, 수업이 다 끝나고 둘만 남았을 때 교수님이 하신 질문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네 지도교수님 OO 교수님 아니니? 그렇다면 이 논문에 동의할 수 없었을 텐데. 네 지도교수님과 같은 분야에 있는 학자들은 보통 이 논문이 아주 문제가 많다고 보거든. 이전에 한국에서 어떤 연구에 참여했었니? 그때도 지금과 같은 전공이었니?" 그 질문은 마치 '네가 진짜 그 전공자가 맞다면 이게 오류 투성이라는 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으로 들렸다.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도 그 말은 꽤 큰 충격으로 남아 어제 종일 우울했고 오늘까지도 여파가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리고 내 실력이 이 정도뿐인 걸, 인정하고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문득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쏟아내던 미국애들을 떠올려 본다. 그 아이들도 어제 내가 받았던 그런 질문들을 받았을 때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부끄러움과 우울함을 느꼈을까? 코로나로 어쩔 수 없이 온라인 강의가 진행되어야만 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한 미국인 학생이 심지어 '이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는 수업'이라며 컴플레인하는 걸 본 적 있다. 그 학생은 자신이 이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라면서 모든 것을 코로나 탓으로 돌렸다. 내가 보기엔 그냥 자신이 논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말이다. 집중력의 차이야 있겠지만 오프라인으로 배울 걸 온라인으로 배운다고 이해력이 급강하하는 일은 드물지 않나?? 뭐 어쨌든.....
처음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선배들로부터 진짜 많이 들었던 조언 중 하나가 '네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신경을 끄라'는 것이었는데, 정말 매일 같이 그 조언이 얼마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었는가를 갈수록 뼈저리게 깨닫는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곤 그저 매일 같이 규칙적이고 꾸준히 읽고 쓰고 분석하는 것, 그뿐인 것이다. 내 맘에는 결과적으로 안 들었지만 내 딴에는 나름 열심히 준비한 발표였으니 끝나고 교수님께 들은 속상한 이야기들은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 고 스스로에게 되뇌어 본다. 꾸중이나 타박을 자기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아야지 자기 비하의 밑거름으로 삼았다간 남는 것은 우울 밖에 없다. 뭐 어쩔 거야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신기하게도 배우면 배울수록 더 명확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아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안다고 믿었던 것들이 정말 아는 게 맞았던 걸까 의심만이 늘어난다. 죽을 때까지 업데이트해야 하는 것이 지식이 아닐까 싶다. 매일의 노력은 너무 사소하고 좀스러워서 당장은 아무런 결과가 보이지 않고 따라서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하루에도 몇 번씩 의구심이 들지만, 매일 조금씩 자라다가 어느 순간 보면 확 자라 있는 손톱처럼, 머리카락처럼, 내 지식도 어느 날 보면 이만치 성장해 있기를 아주 소심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