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vs 만추
지금까지 영화 <만추>는 세 번 만들어졌다.
최초의 <만추>는 1966년 이만희 감독이 고 강신성일과 문정숙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그보다 더 오랜 필름도 보존되어 있는데 왜 이 작품은 유실이 되었던 걸까? 복구는 불가능한 걸까? 그나마 1981년도에 김수용 감독이 김혜자와 정동환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두 번째 필름은 아직 건제하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온 <만추>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감독이 워낙에 영화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현빈과 탕웨이 그리고 미국의 어느 안개 낀 도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다. 더구나 멜로 아닌가? 이번에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보았더니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꽤 남달랐다.
이야기의 기본 틀은 같다.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한부 석방으로 풀려난다. 우연히 기차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2년 후 석방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 기본 틀이다. 하지만 영화로서 보여주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여주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감독의 역량도 다를 것이다. 또한 그때마다 감독은 선배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왜 감독들은 세대를 달리하면서 <만추>를 만들까? 가끔 그런 영화가 있다. 유명한 건 아닌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보석 같은 영화. 이를테면 <길>이나 <파이란> 같은 영화 말이다. 그런 것처럼 감독들 사이에서도 나라면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오감을 간질이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그게 김수용, 김태용 감독에겐 이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영화감독이라면 생애 한 번쯤은 정말 괜찮은 멜로 영화 만드는 게 로망 아닐까? 그런데 <만추>만 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해 아래 새것은 없으니.
분명 김수용 감독의 작품도 당시로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용 버전을 보니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마치 똑같은 작품을 소설과 영화로 보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김수용 버전은 인물 보단 이야기 구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규모 있게 전달해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김태용은 캐릭터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앞의 작품은 다소 평면적인 느낌인데 반해, 김태용 버전은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든다. 보여줄 것도 많고.
사실 지난 세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 옛날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때 당시에는 꽤 세련된 연출을 구가한다고 해도 지나면 빛을 바라고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어색하다. 그건 요즘의 세련된 영화도 같은 운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가 없다. 좀 미안한 말인데,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을 그러니까 30년 전만 해도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중요도가 얼마였을까 의문 스스러워졌다. (이미 했던 말이긴 한데) 영화판에선, 잘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말아먹는 일은 있어도, 못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살려내는 법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는데 왠지 이 말이 그 당시엔 별로 신빙성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감독을 위한 예술이었던 만큼 제왕처럼 군림하고 시나리오가 연출보다 앞서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작품 자체로선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옛날 영화의 평점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왜 관객들은 제작자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낮은 평가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퀄리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투자를 해야겠지만 투자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오는 <만추>는 확실히 시야가 깊고 넓다. 한마디로 <만추>의 글로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배우가 나온다는 것부터도 그렇고, 장소 역시 한국을 넘어 미국이란 나라다. 시나리오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썼다. 언어의 유희를 극대화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영화는 여자 주인공 애나가 복역수이고 72시간 후면 교도소로 돌아간다는 사실 외에 진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영화 속 거짓말은 의도되거나 일부러 가공된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남녀 주인공은 영어란 공통어가 아니면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언어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데 방해되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랑을 완성시켜 준다. 물론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또한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대사를 보면 뭔가 불온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요즘 드라마 작가들 어떻게 하면 시청자의 귀에 걸릴까 고민을 참 많이 하는데, 사각의 브라운관을 앞에 놓고 그렇게 귀에 걸리는 대사를 듣는 맛이 없다면 우리가 왜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겠는가.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뭐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고 이건가 싶으면 저것 같고, 저것 같으면 이것 같다. 내가 내뱉고도 이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그런 불완전성을 잘도 포착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은 친절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훈이 애나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내연녀를 살해한 피의자라는 것이 드러나는데 영화를 되돌려 봐도 훈이가 내연녀를 살해했다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내연녀의 남편이 내 아내를 죽인 피의자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게 우겨서 될 일은 아닌데 좀 불친절해 보인다.
사실 <만추>는 김지헌 작가가 1966년에 쓴 작품이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해방이전에 서울로 이주해 경동중학교를 다니면서 영화 예술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시나리오들을 탐독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좀 놀랐다. 솔직히 우리나라 작가들은 소설 아니면 시를 탐독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지 않는가?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니. 게다가 얼핏 그 시기가 3,40년대였을 텐데 그 시절에 읽을 시나리오가 있었을까? 우리나라 영화판은 얼마나 척박했을까? 꿈꾸기 어려운 시대에도 꿈을 꿨다. 그런 걸 보면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며 우린 너무나 쉽게 꿈을 접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더구나 그의 시작은 1956년 미당 서정주의 격찬을 받으며 시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시작이 이러다 보니 유럽 예술영화의 시적 리얼리즘을 국내에 토착화시키면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고양시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각 시대 감독들마다 작업에 탐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만추>가 지금까지 세 명의 감독에 의해 세 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다음은 또 어느 감독이 똑같은 제목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나올지 모르겠다. 그런 감독이 있다면 미리 박수로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나는 기꺼이 봐줄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