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징의 숲을 산책하는 산책자이다.
우연히 더 걸어가 본 길모퉁이 깊은 곳에서 상징의 숲을 만났다. 상징의 안경을 쓰고 상징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상징을 해석하고 소통하며 상징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상징은 언어보다 더 모호하고 느리고 다층적이다. 상징은 언어보다 많은 걸 품고 있다. 간접적인 언어로 옮길 수도 있지만, 그보단 먼저 느낌이나 기분이란 형태로 마음으로 전해진다. 상징은 영혼의 언어이다.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영혼의 언어는 해독할 필요가 없어 오해조차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거대한 원형의 조각들로 조합된 상징의 세상이었다. 언어는 신호이고 메시지는 상징이다. 그가 상징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언어의 본질은 상징이다. 상징의 언어를 말하고 듣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건 언어의 정원을 가꾸는 훈련과는 정반대이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일을 이제는 할 수 없어 복원하는 과정과도 같기 때문이다. 채워 넣은 인습을 덜어내고 비워내는 연습이다. 열심히 쌓아 올린 모래성을 파도에 휩쓸리도록 놓아 보내주는 연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연습이다.
상징은 소리가 아주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상징을 듣기 위해서는 고요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상징은 나의 도움 없이도 흔적 없이 왔다 간다. 언젠간 상징의 목소리가 꼭 들릴 거라는 믿음이 생기면 더 이상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배운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곳에서 그를 억지로 찾아내거나 소리를 키우는 방법 같은 건 없다. 상징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빌려 쓰고 전해지는 공기의 흐름이다. 상징으로는 정원을 만들 수 없다. 상징은 숲이다.
상징의 숲을 오고 가면 다른 방식에 익숙해진다. 가령 낮잠을 자다 절반쯤 깬 나를 소파에서 깨우기 위한 협박이 통하지 않게 된다. 몇 시간을 잤고 무엇을 못 했으며 지금 당장 이것을 하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를지 양심을 파고들어 죄책감이 들도록 공격했다. 그러나 상징의 세계에서는 더 좋은 걸 제안해야만 움직인다. 지금 창가로 걸어가면 노을을 볼 수 있어. 저것 좀 봐. 주홍빛이 반쯤 가려져 있잖아. 물을 마시면 너무 시원하지 않을까? 솔깃한 제안을 받을 때만 영혼은 귀를 열고 행동하게 된다.
상징의 숲에서는 언어의 불완전함이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하나의 상징에도 완전히 다르게 들리는 언어로 불리기도 하고, 한 단어는 다양한 상징을 가리키는 신호가 된다. 대립하던 모순의 언어는 상징 안에서 결합하고 화해되고 와해되고 완성된다. 미움은 사랑이 되고 두려움은 용기가 되고 불안은 평온이 되고 우울함은 생기가 되고 어둠은 빛이 된다. 언어가 오해 돼도 상징은 오해되지 않는다. 상징 안에서 비로소 언어는 자유롭다.
누군가의 언어의 정원을 보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곳을 지나쳐 늘 상징의 숲을 보러 간다. 그곳에서 가만히 귀 기울여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려 나무가 부대끼고 풀숲 작은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다. 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을 따라 흰 나비와 춤추고 진한 소나무 향을 맡아본다. 우리는 상징의 숲을 산책하는 산책자이다.
2022년 2월 22일, 작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