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좋은 클라이언트를 찾아서
중요한 건 사람
일하면서 돈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아닐까?
회사를 다니면서 좋은 회사를 다니는 것도, 좋은 연봉을 받는 것도 좋다. 하지만 아무리 남들이 알아주는 멋진 회사에 나쁘지 않은 연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만나는 사람들이 최악이면 어떤가. 열심히 번 연봉은 고스란히 병원비로 쓰일 것이다. 그게 물리적인 병원비이든, 정신과 비용이든 말이다.
프리랜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귀국한 지 6년 차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면서, 많진 않지만 여러 클라이언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많은 돈은 주지 못했지만, 늘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비즈니스 매너를 지키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지만 내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일방적인 지시로 스트레스를 주던 사람들도 분명 있다. 문득 뒤돌아보니, 그들의 행동에는 여러 패턴을 읽을 수 있었다.
좋은 클라이언트의 특징
적정한 금액을 정중히 요청한다.
모든 출판사가 다 Macmilan, Penguin Books 같은 거대 출판사처럼 예산이 넉넉하진 않다. 특히 코로나 이후에 출판 붐이 잠깐 일었는데, 곧 세계정세가 다시 불안해지면서 미국사람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지고 있다. 당장 집값과 먹고사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문화비용을 모두 줄이면서 영화, 애니메이션, 출판 산업 등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는 전체적인 파이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이다. 때문에 줄어든 예산에 대한 여러 고민 역시 이해는 한다.
그렇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돈을 제시하면서 일을 의뢰하는 건 정말 모욕적이다. 출판계의 모든 일들은 최소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캐릭터를 만들고 콘티를 짜고, 스토리보드를 발전시키고 완성까지…6개월도 정말 빠듯한 일정이다. 그런 기간에 최소 시급도 안 되는 돈을 쥐어주면서 일을 맡긴다? 그것도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아티스트에게?… 아마도 해외의 아티스트들은 적은 돈을 주더라도 일을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글쎄다. 그렇게 해서 책이 나와봤자 의욕 없이 그린 그림책이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문화적 배경을 존중해 주는 사람들
사실 상업 그림작가로서 꾸준히 일하기 위해선, 일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요구를 많이 반영해서 그리는 게 정석이다. 나의 욕심은 제쳐두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잘 반영시키는 게 프로라고 늘 생각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프로젝트에 대한 욕심도 점차 줄어들었다. 내가 하는 일에 10%의 내 개인적인 욕망이 조금씩이나마 스며들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기대치를 점차 줄이는 것, 이게 프로작가의 생존법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한국적인 요소들을 배경에 조금씩 넣는다거나, 프로젝트 자체가 한국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인지 다른 그림책보다 한국사람, 한국적인 요소가 조금이나마 있는 작품에 더 큰 애착이 간다. 난 역시 본투비 한국인인 걸까?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한국사람들과 한국음식을 먹으며 한국말을 할 때보다, 해외에서 영어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구태여 설명해야 할 때, 내가 역시 “한국인”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실감한다. 그렇게 나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 주고 배려를 해주는 클라이언트들, 구글 평점이 있다면 5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싶다.
계약서에 적혀있는 작업 일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출판사
일을 하다 보면 일정이 초과될 수도 있고 좀 이르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 (보통은 초과되기 마련이지만!). 모든 스케줄- 요컨대 스토리보드, 스케치, 완성 마감일정 같은 굵직한 것들은 모두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이런 게 있는 이유는 서로를 위해서다. 출판사는 출판 스케줄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프리랜서인 그림작가는 다른 일을 같이 무리 없이 소화하기 위해서다. 이게 엉켜버리면 출판사는 괜찮을지라도, 바로 그 스케줄에 맞춰 다른 일을 계획한 그림작가는 큰 낭패를 입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일정을 제대로 지키는 게 비즈니스 매너이다. 만약 안된다면 최소 일주일 전에라도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고 의견조율을 할 수 있도록 바로 조치를 해야 한다! 그림 일은 50%이고, 나머지는 의사소통 스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난 제대로 된 영어공부를 이 그림일을 통해서 배웠다고 해도 될 정도로, 실제 현장에서 내 소통 능력이 많이 향상된 것을 느낀다. 좋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이런 좋은 배움을 얻는 것이다.
다음엔 나를 지치게 하는 클라이언트의 종류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