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들의 인생에 대해
작가를 알아가는 창
이래저래 창작책을 만드는 일이 어려움에 봉착하다 보니, 그림책을 여러 권 들추다가 문득 그림책 작가들의 삶이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 세상에 나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대략 1850년대를 전후로 유럽에 공립학교들이 생기면서,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조금씩 출간되었다. 시라던지 문학, 에세이 등 다양한 문학작품들은 비교적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형식의 그림책들은 그 역사가 채 200년이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출판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책 작가들의 일생을 살펴보다 보면, 최근의 근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앤서니 브라운이나 존 버닝햄 같은 영국 작가들의 유년의 시절은 2차 세계대전을 빼놓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무민 시리즈로 유명한 토베 얀손도 젊은 시절에 세계대전이 터져서, 가장 빛나야 할 20대와 30대의 초반을 정말 암울하게 보냈다. 그래서 아래에 설명할 여러 책들을 보면서, 개인의 삶은 시대적인 어려움과 떼려야 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조금씩 읽어본 그림책 작가들의 에세이 책들을 몇 개 추천하고 싶다.
한국에도 여러 번 방한한 바가 있는 앤서니 브라운은 영국의 쉐필드에서 태어났다. 78세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현업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작가가 아닐까? 이 책은 제법 두꺼운 작가의 자서전이며, 지금까지 출간해 온 그림책을 어떤 삶의 맥락에서 만들었는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어떤 부분이 작품에 담겨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작가의 어릴 적 가족사진, 어릴 때 그린 낙서나 엽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시기의 그림들... 정말 다양한 자료들이 담겨 있어서, 앤서니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정말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작가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앤서니 브라운은 늘 작품으로만 스스로를 이야기할 뿐,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한 번도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러 작품을 쌓아오고, 스스로의 작품과 인생을 돌아볼 즈음에 쓴 이 책에서는, 작품 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 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다지 이상적이지 않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림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흥을 좋아했던 아버지,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은 자신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걸까? 다행히도 앤서니 브라운은 아직도 건강하게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그리고 있으니, 그저 팬으로서 다행스러울 뿐이다.
위의 앤서니 브라운의 책에 비하면, 존 버닝햄의 책은 다소 퉁명스럽고 불친절할지도 모른다. 이 책 역시 존 버닝햄의 여러 작품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작가가 어떤 계기로 스토리를 만들게 되었는지 큰 도판의 그림과 함께 짧게 설명해주고 있다. 세세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며 자신의 작품과 오래된 옛 기억을 접목하던 앤서니 브라운과는 달리, 이 책은 세부적인 디테일이 많이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존 버닝햄 특유의 위트와 블랙 코미디 같은 유머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가족들과 캐러밴 차를 타고 전국 곳곳을 누빈 경험 탓에, 정말 자유롭게 작품을 만드는 존 버닝햄의 스타일은 앤서니 브라운의 정돈된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석판그림, 입체 모형, 사진 위에 그린 드로잉, 큰 조약돌에 그림을 그려서 사진을 찍는 등등… 그야말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답다. 그래서인지 60-70년대 다소 보수적인 영국 아동출판계에서 그의 작품들은 많은 반향을 몰고 왔다. 심지어 몇몇 “불온한” 페이지 때문에 일부 책들은 도서관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이제는 “아동문학”이라는 장르가 어엿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동시에 많은 그림책들의 스타일들이 다소 정형화되었다. 최근 많은 그림책 작업들이 편집의 용이함 때문에 디지털로 많이 만들어지면서, 그런 정형성이 더 고착화된 것 같다. 하지만 존 버닝햄의 발칙한 발상과 지루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반골기질… 그리고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투박하고 생기 넘치는 그림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굳이 어린이 문학에 큰 교훈이 필요할까? 그저 교훈을 빌려서 어린이들에게 설교하고 싶은 우리 어른들의 욕심 아닐까.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어린이 문학 본연의 감성을 다시 일깨워준다.
이미 "파도야 놀자"로 젊은 나이에 명성을 떨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에세이이자 작품책이다. 아직도 다양한 실험적인 그림책을 만들며 꾸준히 활동하는 작가인데, 이 책은 초기작 "파도야 놀자", "거울 속으로", "그림자놀이" 삼부작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수지 작가의 책은 여러 권 소장도 하고 있고 늘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그림책을 설명하는 작품책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수지의 초기 삼부작인 저 책들은, 왜 우리가 그림책을 "책"이라는 형태로 봐야만 하는지에 대해 잘 알려주고 있다. 표지와 그림이 있는 페이지, 그리고 중간에 있는 Gutter까지, 이 모든 "책"의 형태를 빌려서 작가는 아주 독창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수지 작가의 삼부작은 여러 복잡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얽힌 다른 그림책과는 차별화된다. 보통의 그림책들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페이지를 소비하지만,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들은 "그림책"이라는 형태를 갖고 자유롭게 놀고 있다.
"파도야 놀자"는 가로로 긴 파노라마 형식의 그림책 형식을 빌려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울 속으로"는 책을 펼친 양쪽 면을 연극적으로 활용해서 그림체는 심플하지만 구조적으로 실험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그림자놀이"는 아예 책을 90도로 돌려서 봐야지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도록 구상했다. 매우 즉흥적이고 직관적이지만, 분명 모든 스토리 안에는 기-승-전-결의 네 가지 법칙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수지 작가의 초기 작품들은 스토리 전개 위주의 다른 작가들의 책에 비해 분명한 개성이 있다! 최근 스토리보드를 짜면서 "그림책"이라는 장르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이 작품책을 보면서 머릿속의 막혀있는 것들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그림책에 대해 좀 더 다르게 접근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좋은 책이다.
이 책은 무민 시리즈로 유명한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전기책이다. 사실 무민 시리즈는 그림책으로만 접한 게 전부일뿐, 소설 시리즈로는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이후 무민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서 소설책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책은 토베의 어린 시절과 가족관계에 대해 아주 소상히 이야기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토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막 꿈을 펼칠 시기인 20대와 30대에 전쟁을 맞이하면서, 전쟁이 그녀 삶의 큰 변곡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토베는 익히 알려지다시피 평생 미혼으로 살았으며 여성과 연애를 하였다. 하지만 그전에 여러 남자친구들과의 연애, 이별을 겪으면서 남성지배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아주 깊은 고민을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는 더욱더 여성에게 전통적인 역할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평생 조각가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면서 생계까지 책임졌던 자신의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토베의 바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무민 시리즈로 알려지기 이전부터 토베는 이미 다양한 유화작업을 해왔다. 전쟁 중은 물론이고 전후에도 프레스코 벽화 작업과 엽서, 잡지 삽화 등 수많은 일들을 해온 중견작가였다. 무민 동화 시리즈는 그런 토베의 예술 이력 중 하나이다. 무민 캐릭터 이외의 토베 얀손의 다양한 작업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정말 추천하고 싶다. 다만 가독성을 전혀 고려 안 한 글자 크기와 자간 때문에 읽기가 많이 피로하지만, 다양한 사진과 그림 자료들은 토베의 인생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실토하건대 이 책은 산건 대략 5년 전이었다. 작은 단행본 판형의 책인데, 책꽂이에 꽂아놓고 봐야지 봐야지 하고 미뤄뒀다가 결국 보지 않고 5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번에 책장 정리를 하면서 내다 팔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이 책이 눈에 띄어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제목답게 스누피 작가인 찰스 슐츠가 쓴 에세이이자 회고록이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한 찰스 슐츠가 스누피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자신의 일상 루틴과 자신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 슈퍼맨 만화처럼 캐릭터가 인기를 끌게 되면 주로 만화가들은 조수를 두고 대신 그리게 하거나 다른 파생산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찰스 슐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 스스로 그림을 그려서 작업을 마쳤다. 신문에 정기 기고를 하기 때문에 늘 루틴을 지켜서 생활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미리 그려두기 때문에 휴재를 하는 일도 드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리기에, 만화가라서 행복하다고 했던 찰스 슐츠. 최근 내 작업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이 책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했다. 에세이이기 때문에 그림 자료는 적지만, 대가의 인생 비하인드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추천하고 싶다.